<뮬란> & <블랙 위도우>
브런치의 소개 문구에도 써 놓았지만 저는 전역 후에 '고함20'이라는 독립 언론사에서 활동했습니다. 대형 언론사 소속의 매체도 아니고, 후원자가 많아서 자금력이 빵빵하지도 않다 보니 취재는 순전히 소속된 기자들의 역량에 달려 있었죠. 심지어 대다수가 대학생이다 보니 학기 중에 대단한 기사를 써내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고함20에서 한 학기 활동하자 코로나가 터졌고, 취재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죠.
그래서 저를 포함한 많은 기자가 선택한 차선책이 바로 리뷰였습니다. 영화부터 드라마, 웹툰, 소설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들을 보고 읽고 토론하며 리뷰를 작성했고, 실제로도 당시 고함20의 기사 중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문제는 리뷰 대상인 작품들에 접근하는 태도의 차이였습니다. 일례로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에 대해 이야기하면 저는 여성 서사를 내세우긴 했지만 정작 알맹이가 없고, 터미네이터 시리즈에 걸맞은 모습도 보여주지 못한 범작이라고 비판했죠. 반면에 다른 기자 분들은 여성이 대다수의 비중을 가져가는 블록버스터라고 극찬했었습니다. 제가 여성 '영화'를 봤다면 다른 분들은 '여성' 영화를 본 셈이었죠.
그러다 보니 활동 당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몇몇 작품의 경우 리뷰를 다 썼지만 고함20에서 발행하지 못한 경우도 꽤 있었습니다. 고함20을 나온 후에도 간혹 리뷰 기사를 읽으면 활동할 당시로 되돌아간 듯한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죠. 전자에 해당하는 영화가 바로 실사 버전 <뮬란>이었고, 후자는 <블랙 위도우>였습니다. 데스크를 통과하지 못했던 제 리뷰에는 이들이 왜 '여성' 영화일지언정 좋은 여성 '영화'는 아닌지 그 이유에 대한 분석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기를 지녀 무예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뮬란(유역비)’. 그녀는 좋은 집안과 인연을 맺어 가문을 빛내길 바라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본래 자신의 모습을 억누르며 지내지만 자신의 본모습이 무엇인지를 거듭 고민한다. 어느 날, '보리 칸(제이슨 스콧 리)'이 이끄는 유목 민족은 뮬란처럼 기를 지닌 마녀 '시 아니앙(공리)'의 도움을 받으며 실크로드의 주요 기지들을 점령해 나가고, '황제(이연걸)'는 전국에 징집령을 내린다. 이에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던 뮬란은 한쪽 다리를 다친 아버지를 대신해 몰래 전장에 나간다. 자신의 성별이 발각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와중에도 타고난 기를 활용해 가며 역경과 훈련을 극복해 나가던 뮬란. 마침내 '텅 장군(견자단)' 밑에서 도착한 전쟁터에서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시아니앙을 마주하고, 자신의 본모습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 미래를 선택할 기로에 선다.
1998년 개봉한 동명의 원작 애니메이션을 리메이크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화 작품 <뮬란>은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디즈니 프린세스'로 일컬어지는 여러 공주 캐릭터를 변화하는 사회상에 발맞추어 재해석하겠다는 디즈니의 야심이 엿보이기도 하죠. 여성 감독과 여성 작가 등 다수의 여성 제작진이 참여한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뮬란>의 차별화 시도, 기(氣)
다만 <뮬란>에게는 한 가지 근본적인 난점이 있었습니다. 원작에서의 뮬란이 이미 디즈니 프린세스 중 가장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상을 선보였다는 점입니다. 뮬란은 부족한 체력, 무술과 전략적 식견을 의지와 끈기, 노력으로 성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억압하던 사회의 편견을 뚫을려고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뮬란이 아버지 대신 전쟁터로 나가는 시퀀스가 명장면으로 남고, OST였던 "Reflection"이 불후의 명곡으로 기억될 수 있는 이유였죠.
이에 <뮬란>의 제작진은 원작에 없었던 '기(氣)'라는 능력을 뮬란에게 선물하며 차별화를 시도합니다. 작중 기는 영웅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여성이 기를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기를 사용하는 여성은 마녀라고 손가락질받기 마련이죠. 이러한 배경에서 강력한 기를 타고난 뮬란은 자기 능력을 알면서도 부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뮬란은 뻔한 길을 가지 않습니다. 시아니앙과의 만남이 계기였죠. 기를 사용하는 마녀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추방당했던 시아니앙을 만나 그녀의 사연을 들은 후, 뮬란은 그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자기 능력을 당당히 사용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즉, 뮬란과 시아니앙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인 기는 한 여성의 성장 과정과 여성 간의 연대라는 주제 의식을 전달하는 도구인 셈이죠. 또 여성의 연대감을 토대로 과거의 차별을 극복할 새로운 세대가 나서야 한다는 광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치로도 활용됩니다.
뮬란의 정체성이 흔들리다
문제는 차별화 시도로 인해 뮬란이라는 캐릭터의 고유한 가치와 여운이 오히려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뮬란의 가장 큰 매력은 비장함과 절실함이었습니다. 선천적 능력 없이도 중국 최고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담긴 감동, 남성들 속에서 밀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관객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죠.
하지만 새로운 뮬란은 태어나면서부터 강력한 기를 타고난 전형적인 영웅입니다. 그런 그녀가 전 중국의 영웅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일 뿐, 그 과정에서는 체감되는 역경의 정도도 덜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뮬란이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터로 가거나 능력을 깨닫는 대목처럼 유달리 가슴을 뛰게 하는 극적인 장면도 등장하지 않죠.
사실 이처럼 캐릭터의 재해석이 원작의 장점을 파괴하는 결과는 디즈니 영화에서 그리 낯선 현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뮬란>은 이전과는 다른 문제점, 디즈니의 무지까지도 노출하기에 더욱 실망스럽습니다. 변화의 핵심 키워드로 내세운 '기'라는 설정이 중국과 동아시아의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전무함을 보여주기 때문이죠.
맥락 없이 재활용된 '마녀'라는 스테레오 타입
작중 뮬란이나 시아니앙은 자신의 기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마녀라고 손가락질받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 등의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애초에 마녀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습니다. 무녀나 무당 정도가 존재할 뿐이고, 신비스러운 혹은 위험한 능력을 지닌 노파에 대한 전승 정도를 만날 수 있을 뿐이죠.
반면에 중국 문화권에서는 양귀비나 초선처럼 경국지색이라 불리며 성적인 매력으로 나라의 운명을 기울게 한 여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한 경우가 오히려 많았습니다. 또 마법과 같은 주술을 부려서 천하를 혼란스럽게 하는 인물을 떠올리면 도교적 이미지의 도인, 초인들을 연상하기도 하죠. 황건적의 난이나 태평천국 운동 등을 주도한 이들, 한국의 경우에는 최제우와 같은 이들이죠. 무엇보다도 해당 인식에 뒤따라오는 성별 이미지가 없는 게 핵심입니다.
또 무력을 쓰는 여성에 관해서는 직접 몸으로 부딪쳐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은 여장부들에 관한 설화가 더 많기도 했습니다. 당장 뮬란만 해도 남북조시대의 시가인 <목란시>의 주인공인 화목란이 각색된 캐릭터죠. 또한 <홍계월전>의 홍계월 역시 여러 차례 조국을 전쟁과 반란에서 구해낸 영웅이며, 역사적으로도 명나라 말기에 활동한 진양옥 장군은 무너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투한 여성이었습니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신화 속 메데이아, 아서왕 전설의 모건 르페이와 같은 마녀에 대한 전승과 전통이 꾸준히 이어져 왔습니다. 판타지 소설인 <나니아 연대기>에서도 하얀 마녀가 절대 악으로 등장하죠. 결국 중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기를 사용하는 마녀가 등장하는 것은 문화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불충분한 결과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뮬란을 동양의 잔 다르크 정도로 해석한 후 서양권의 전통을 곧이곧대로 가져와 배경만 바꾼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죠.
'여성' 서사 이전에 '영화' 완성도가 문제다
사실 <뮬란>은 개봉 당시 여러 논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원작의 캐릭터들이 삭제되거나 쪼개지고, 새로운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하며 원작의 OST가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은 팬들의 우려를 사기 충분했죠. 주연 배우인 유역비도 홍콩 민주화 사태와 관련해 중국 옹호 발언을 해서 반감을 키웠습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공안처럼 위구르족 인권 탄압과 관련된 단체의 이름들이 엔딩 크레디트에 수록된 것이 알려지기도 했죠.
하지만 공개된 <뮬란>의 결과물은 영화 외적 논란도 큰 문제가 아님을 방증합니다. 상술한 모든 논란과 걱정을 문제로 삼지 않더라도, <뮬란>은 영화 그 자체로 제목이 같다는 것 말고는 도저히 원작의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실패한 리메이크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 여성이 속해 있는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모두 간과한 서사가 위치합니다.
어벤져스가 분열한 후 '로스 장관(윌리엄 허트)'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도망친 ‘나타샤 로마노프/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어느 날 오래간만에 휴식을 취하던 그녀 앞에 16년 전 위장 가족으로 첩보 작전에 함께 투입되었던 가짜 여동생 '옐레나(플로렌스 퓨)'가 나타난다. 그녀는 나타샤가 과거에 제거한 줄 알았던 소련 첩보조직 레드룸의 수장 '드레이코프(레이 윈스턴)'가 건재하며, 레드룸이 여전히 많은 위도우들을 세뇌해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에 나타샤는 상대의 능력을 복제하는 빌런 ‘태스크마스터’와 새로운 위도우들의 위협에 맞서 레드룸을 제대로 파괴하기로 결심하고, 레드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한 때 옐레나와 함께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첩보활동을 했던 옛 동료 '알렉세이(데이빗 하버)'와 멜리나(레이첼 와이즈)'를 찾아간다.
어벤저스 원년 멤버 중 홍일점이자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사망한 블랙 위도우의 첫 솔로 영화인 <블랙 위도우>는 풍성한 선물 보따리 같아 보였습니다. 개봉 당시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이후 2년 만에 만나게 된 마블 영화였기에 MCU의 팬이라면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죠. 원조 어벤져스 멤버 6인 중 홍일점이자, 솔로 영화가 없었던 블랙 위도우 단독 영화이기에 그녀가 보여줄 이야기에 대한 기대도 컸습니다. 그저 MCU의 첫 여성 주연 영화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게 문제였죠. 차별화된 소재도 두드러지지 않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도 인상적이지 못했습니다.
가족 영화로서 <블랙 위도우>
<블랙 위도우>의 드라마는 크게 여성 영화 서사 가족 영화 서사와 여성 영화 서사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타샤는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한편, 레드룸에 세뇌된 다른 위도우들을 해방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죠. 전자는 나타샤만의 개인적인 이야기이고, 후자는 나타샤를 매개로 그려낸 보편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플롯은 모두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우선 네 주인공이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너무 빠르고 간편하게 진행됩니다. 나타샤, 옐레나, 알렉세이, 그리고 멜리나가 만나는 순간 그들 사이에는 긴 시간만큼 날카로워진 아픔과 오해가 쌓여 있습니다. 위장 가족을 진짜라 믿었던 옐레나는 배신감을 호소하고, 나타샤는 레드룸에서 비윤리적인 연구를 진행한 멜리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위장 가족 작전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알렉세이와 멜리나는 자매의 태도에 당혹스러워하죠.
그런데 영화는 16년의 세월 동안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단칼에 잘라버립니다. 알렉세이와 옐레나는 그들이 오하이오에서 자주 듣던 'American Pie'를 함께 흥얼거리면서 서운함을 말끔하게 씻어내죠. 작전을 위해 찍은 가짜 가족 앨범을 보던 나타샤는 멜리나에게 그녀가 남긴 말을 일종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멜리나는 크게 감동하더니 레드룸을 완전히 떠나기로 결심하죠. 이 두 장면을 제외하면 작중 네 식구가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장면은 전무합니다. 그들은 곧장 끈끈한 가족이 되어 레드룸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죠.
사실 나타샤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기억하지 못하던 혈연을 찾는 이야기는 MCU의 세계관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내용입니다. 나타샤는 가족이 혈연관계가 아니라 함께한 세월과 경험을 공유하는 관계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 결과 그녀는 자신에게 두 가족이 남아있다는 걸 알죠. 그녀에게는 영화 속 가족과 어벤져스라는 또 다른 가족이 있습니다. 이는 나타샤가 어벤져스라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미래에 개연성을 더하는 중요한 근거죠. 그녀의 뒤를 잇기로 한 옐레나의 선택에도 당위성을 심어줄 수 있고요.
이처럼 <블랙 위도우>에서 가족 드라마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영화의 스토리텔링은 지나치게 가볍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이 직접 영향받았다고 밝힌 엑스맨 시리즈의 <로건>과 비교해보면 가족의 화해와 결성 과정이 얼마나 분량과 비중 면에서 소홀히 다루어졌는지 쉽게 알 수 있죠.
나타샤의 여성 해방 서사가 공허한 이유
또 다른 축인 여성 해방 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레드룸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게 된 나타샤가 다른 위도우들을 해방하는 플롯 자체는 이상할 게 없습니다. 나타샤는 레드룸에서 학대당한 피해자이고, 그녀가 그 기억과 관련해 큰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등의 작품에서 이미 밝혀졌기 때문이죠. 히어로인 그녀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돕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 영화 외적으로도 의미 있는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는 여러 수난을 겪은 바 있기 때문입니다.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전 CEO인 아이작 펄머터가 성 캐릭터의 완구 판매량이 적다는 이유로 블랙 위도우의 완구 판매를 중지시킨 사건이 대표적이죠.
문제는 위도우들을 구해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습니다. 영화는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할 여지를 주지 않고 급하게 목적지를 향해 뛰쳐나갑니다. 예를 들어 나타샤는 그녀가 부다페스트에서 죽인 줄 알았던 드레이코프의 딸 안토니오와 재회하죠. 죄책감 때문에 나타샤는 해독제를 뿌려 그녀를 아버지의 세뇌로부터 풀어주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녀의 존재와 정체성을 상기시킵니다. 그렇게 나타샤는 용서를 빌고 안토니오는 사과를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계적으로 세뇌됐다 하더라도 자신과 전혀 무관한 이유로 자신을 죽일 뻔했던 사람의 말만 듣고서 아무런 적대감 없이 순순히 상대방을 용서하는 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전개가 아닙니다. 피해자인 안토니오의 심리가 묘사되지 않은 채 나타샤의 감정선만 일방적으로 전개되기에 더욱 이해 되지 않죠. 이는 16년이 넘도록 레드룸을 위해 일하던 멜리나가 나타샤와의 짧은 대화만으로 마음을 돌리는 장면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제의식과 메시지에 캐릭터들의 대사와 행동을 끼워서 맞추는 작위적인 전개가 초래한 결과인 셈이죠.
시리즈의 부속품임을 간과한 <블랙 위도우>의 실책
특히 안토니오나 다른 위도우들처럼 세뇌당했던 다른 캐릭터의 사례를 떠올려 보면 <블랙 위도우>의 문제점은 더 분명해집니다. 사실 <블랙 위도우>는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와 매우 유사합니다. 두 히어로 모두 자신의 과거 때문에 고통이죠. 캡틴은 가장 절친한 전우인 버키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나타샤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어린아이였던 안토니오를 죽였습니다.
죄책감의 대상이 한때 자신이 제거했다고 믿은 적(하이드라와 레드룸)에게 세뇌당한 상태로 재등장하는 것, 두 히어로 모두 그들의 세뇌를 풀려고 노력하는 것, 그 과정에서 자신의 후계자(팔콘과 옐레나)를 찾는 것도 동일하죠. 세뇌 피해자인 윈터솔져와 안토니오 모두 자신이 속한 집단 안에서 철저히 을의 입장에 있던 것도 공통점이다. 단지 세뇌당한 피해자가 여성이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하지만 안토니오가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했지만 윈터 솔져(버키)는 세뇌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위해 3편의 영화와 한 편의 드라마에 걸쳐 스스로와 싸워야 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윈터 솔져>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블랙 위도우>의 여성 해방 서사는 매우 어색해집니다.
안토니오는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입니다. 그녀가 윈터 솔져처럼 자신의 주도권과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죠. 그 결과 그들을 내리찍고 있는 억압과 폭력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고, 여성 간의 연대와 해방이라는 메시지에도 의도한 만큼의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극 전개의 중심 소재로 등장하는 빨간 해독제의 존재가 간편한 스토리텔링을 위한 도구로 보일 정도죠.
사실 '여성' 영화여야 하는지, 아니면 여성 '영화'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할지도 모릅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주장은 좀처럼 말이 안 되니까요. 다만 '여성'에 방점을 찍는 분들에게는 영화가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신들의 신념, 사상, 입장을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니 꼭 그 메신저가 영화일 필요가 없죠.
문제는 영화 팬의 입장에서 프로파간다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영화들을 환영하기가 참 어렵다는 점이죠. 영화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가 프로파간다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메시지에 완성도와 개성이 억눌린 평면적인 작품들이 제작되는 게 과연 긍정적인 변화일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 이 답 또한 관객들의 선택에 달려 있겠죠. 특히 상업 영화라면 흥행에 신경을 안 쓸 수 없으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앤데믹 시대에 만나게 될 '여성 영화'들의 귀추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