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스 오브 막시> & <라스트 듀얼>
지난 몇 년 사이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친 사건을 꼽아보라 한다면 미투 운동을 빼놓을 분은 많지 않을 듯합니다. 또 미투 운동이 실질적으로도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일단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은폐되었던 범죄 사실을 알릴 수 있었고, 진작에 받아야 했던 처벌이 가해자들에게 주어지고 있죠. 또 오랜 시간 유지되어 왔던 성범죄에 대한 고정관념을 뿌리 뽑는데 기여하는 중입니다. 성범죄의 원인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서 찾는 식의 잘못된 관행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죠. 마지막으로 미투 운동이 꼭 성범죄 사건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할 이유는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권력과 위계를 이용한 범죄에 맞서는 사회 운동이니만큼, 사회 곳곳의 부조리를 고발하는데 미투 운동이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죠.
하지만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있죠. 시간이 흐를수록 미투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습니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인 듯합니다. 일단 미투 운동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는 의견이죠. 미투 운동의 창설자인 타라나 버크는 "미투 운동은 배타적 대립을 보여서는 안 된다"면서 "미투는 성폭력을 겪은 이들 모두를 위한 것이지 여성운동이 아니"라고 밝힌 바 있죠. 당장 케빈 스페이시의 성폭력 스캔들만 보더라도 성폭력의 피해자에는 남성들도 있는데 이들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뒤집어 말해서 미투 운동이 여성들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미투 운동을 수용하는 태도도 뜨거운 감자입니다. 미투 운동은 본질적으로 피해자의 증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회 운동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피해자가 진실만을 이야기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기억에 착오가 있을 수 있고, 자신이 기억하는 게 사건의 전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미투 운동을 악용할 수도 있죠. 따라서 미투 운동을 비판 없이 수용하거나, 미투 운동을 성역화해서는 안 될 겁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미투 운동의 모든 증언과 폭로를 검증 없이 사실로 인정하는 세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가해자로 지명된 사람의 범죄 여부를 입증하는 건 그가 죄를 지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 증명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미투 운동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의심당하는 쪽에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증명하는 상황이 펼쳐질 때도 있습니다. 검사와 피고인의 역할이 뒤바뀐 셈이죠.
<걸스 오브 막시>와 <라스트 듀얼>은 이처럼 미투 운동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을 나름대로 추리고 추려낸 영화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은 전혀 다르지만, 각각 미투 운동의 주요 논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죠. 미투 운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은 <걸스 오브 막시>가 보여줍니다. <라스트 듀얼>은 무비판적인 미투 운동에 내포된 위험성을 꼬집죠. 결국 두 영화는 입을 모아 같은 말을 하는 듯합니다.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다고요.
새로운 학년을 맞이한 '비비안(해들리 로빈슨)'은 절친인 '클라우디아(로런 차이)'와 등교 첫날부터 학기마다 여학생들을 품평하는 리스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불쾌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려고 한다. 그런 그녀 앞에 전학생 '루시(알리시아 파스칼 페냐)'가 나타난다. 자신을 포함해 여자라면 일단 집적대는 미식 축구부 주장 '미첼(패트릭 슈왈제네거)'에게 명확히 거부의사를 표하는 루시. 그런 그녀를 보면서 비비안은 왜 여태까지 쌓이던 분노를 당당히 표현할 용기를 내지 못했는지 생각에 잠기고, 여성 운동을 펼쳤던 엄마의 과거를 알게 된 후 교내 여성 운동, '막시 Moxie(용기)'를 시작한다.
의아할 정도로 일방적인 스토리와 연출법
제니퍼 마티유의 소설을 영상화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걸스 오브 막시>의 초중반부를 보다 보면 눈길이 찌푸려지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영화가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여성 운동을 상당히 작위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연출하기 때문이죠. 교내 모든 여학생에 대한 품평이 전체 메시지로 뿌려지는 와중에 단 한 명의 남학생도 문제의식이 없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게 대표적이죠. 전학생 루시는 이유 없이 미첼로부터 조롱당하고, 교장은 이 문제를 알고도 무조건 사건을 덮으려 합니다. 운동 장학생 선거를 앞두고서는 여성 후보인 '키에라(시드니 박)' 대신 미첼에게만 교내 방송 출연이 허가되기도 하죠. 물론 세상에 불가능은 없습니다만은, 상당히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건 사실이죠.
또 페미니즘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도덕적인 선악의 범주로 치환시킵니다. 영화의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동의하면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이분법을 들이대죠. 비비안은 막시 운동에 소극적인 클라우디아를 일방적으로 다그칩니다. 마초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미첼은 영화 전개에 필요한 모든 악행을 떠안으면서 절대 악처럼 묘사되고요.
여기에 인종 차별을 방패 삼아 페미니즘 메시지와 전달 방식에 대한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듯한 시도도 엿보입니다. 백인 남성 교사는 여성 운동을 지지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지만, 비비안의 애인이자 동양계 남학생인 세스는 적극적으로 교내 여성 운동인 막시를 지지하며 대조를 이룹니다. 운동 특기생 장학금을 두고 경쟁하는 미첼과 키에라의 구도나 교내 성차별 이슈로 대립하는 루시와 교장의 구도가 모두 흑인과 백인의 갈등인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비비안 외에 막시를 주도하는 대다수 인물이 모두 유색인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출이 과연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영화의 연출법은 루시의 질문과 유사합니다. 루시는 왜 백인 중년 남성이 쓴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야 하냐고 질문하죠. 그런데 이 질문은 소설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젠더의 이분법으로 무리하게 치환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일방적인 의견과 주장으로 가득해서 설득력을 갖추기보다는 반발심을 심기에 딱 맞죠.
이유가 있었던 부자연스러움
그러나 <걸스 오브 막시>는 멋진 반전을 선사하며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조금씩 꺼냅니다. 클리우디아는 절친인 비비안이 익명으로 팸플릿을 만들고 캠페인을 계획하며 막시 활동을 이끌고 있음을 눈치챕니다. 그녀는 절친을 돕기 위해 막시를 교내 단체로 정식 등록하죠. 그러나 막시를 좌시할 수 없었던 교장은 클라우디아를 비비안 대신 정학 처분합니다. 소식을 뒤늦게 듣고 찾아온 비비안에게 클라우디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백인이라서 내 입장을 몰라."
비비안은 클라우디아가 적극적으로 막시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었죠. 그런 비비안에게 클라우디아는 미국에 이민 온 동양인의 입장에서 교육과 대학 진학은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며, 따라서 학교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이에 비비안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당연히 옳다고 믿었던,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설령 불의에 저항하는 일이라 해도, 같은 여성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무엇보다도 익명 뒤에 숨어 있던 자신이 클라우디아보다 겁쟁이였다는 사실을 자각하죠. 그래서 그녀는 익명을 벗고 사람들 앞에, 연단 위로 당당히 나서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저항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공간을 열어줍니다.
비비안의 변화와 함께 <걸스 오브 막시>의 스탠스도 정반대로 달라집니다. 자칫 일방적인 프로파간다로 전락할 위험을 영리하게 피해 가며 영화를 접하는 모든 이들을 설득할 힘을 보여주죠.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상황 및 분위기 연출에는 제동이 걸립니다. 인종과 젠더의 대립 구도도 허물어지고, 여성 운동만이 진리라는 신념도 자리를 잃습니다.
그 빈자리는 정체성과 관계없이 자신이 받은 차별에 함께 저항하는 연대의 정신이 위치합니다. 여성과 남성, 백인과 유색인종이라는 이분법 대신 여성 문제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각자 처한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공간도 제시합니다. 그렇게 비비안의 여성 운동은 진정한 '미투 운동'으로 발돋움합니다.
14세기 프랑스, 유서 깊은 카루주 가의 부인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는 남편 ‘장(맷 데이먼)’이 집을 비우자 불시에 들이닥친 장의 친구 ‘자크(아담 드라이버)’에게 강간당한다. 자신의 범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자크는 그녀에게 침묵을 강요하지만, 마르그리트는 감내해야 할 불명예를 각오하고 용기를 내어 그의 죄를 고발한다. 한때 자크와 친우이자 전우였지만 세금 징수, 영지 소유권, 호칭과 계급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던 장은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재판을 요구하며 그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관계가 된다. 그런데도 대영주 '피에르(벤 애플렉)'의 권력을 등에 업은 자크가 강력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자 마르그리트의 재판은 장과 자크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결투 재판으로 결정되고, 마르그리트는 장이 패배할 경우 함께 사형에 처해지는 운명에 놓인다.
비주얼리스트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그간 <블레이드 러너>, <에일리언> 시리즈, <마션> 같은 SF 작품부터 전쟁 영화인 <블랙 호크 다운>, 여성 영화인 <델마와 루이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작을 만들었습니다. 그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글래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 <엑소더스> 등으로 대표되는 시대극이죠. 리들리 스콧의 사극은 과거의 사건과 시대상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항상 현재를 반추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에릭 재거의 원작을 영상화한 <라스트 듀얼>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이유입니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결투 재판을 섬세하게 다루며 하나로 답을 단정할 수 없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죠.
치밀한 3중주가 빚어내는 진실
<라스트 듀얼>에서 가장 눈에 먼저 띄는 특징이라면 역시나 구성입니다. 장과 자크가 결투를 준비하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이내 시점을 과거로 되돌렸다가 후반부에 다시 결투 장면으로 돌아옵니다. 과거 시점에서는 한때 절친이었던 두 남자가 왜 결투 재판까지 펼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볼 수 있죠. 이때 그 과정은 세 명의 관점에서 다르게 제시됩니다. 세 명의 주인공은 각자 경험한 진실을 들려주죠.
1장인 "장 드 카루주가 말하는 진실"은 장의 입장에서 자크와의 불화가 어떻게 마르그리트의 강간으로 이어졌는지를 설명합니다. 2장인 "자크 르 그리가 말하는 진실"은 강간을 저지른 것을 마음 한쪽으로는 인정하면서도 끝끝내 사랑의 표현이라고 합리화하는 자크의 입장을 보여주죠. 마지막 장인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은 피해자인 마르그리트의 시점에서 일련의 사건을 복기합니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마르그리트의 시점에 유독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듯하죠.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이라는 부제목의 글자가 사라지는 가운데, 화면에는 "진실"이라는 글자만이 잠시 남았다가 사라집니다. 마치 마르그리트의 시점이 진실이라고 암시하는 듯하죠.
작중 마르그리트가 영주의 부인이라는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직접 가축을 돌보거나 세금을 징수하는 등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단순하 암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마르그리트는 목소리를 갖기 어려웠던 시대에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권리와 명예를 되찾은 이상적인 여성이죠. 이 경우 <라스트 듀얼>은 중세의 사건을 통해 근 몇 년간 주목받았고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끌어낸 미투 운동의 긍정적인 측면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진실은 어디에?
그러나 결투가 끝난 직후 마르그리트의 표정을 보면 그녀가 이 작품 속 진정한 승리자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맞이했는데도 그녀는 창백하게 질려 있습니다. 허무하기까지 한 표정도 짓고 있죠.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라스트 듀얼>이 엄연히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인물들의 행동은 표면적인 의미와 다른 함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왕좌의 게임>에서 명예와 충성심을 고집하는 존 스노우의 언행이 이해되지 않아도, 작중 세계관에서는 그의 언행이 세력을 구축하는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적 관점에서는 부당하더라도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의미가 깃들어 있을 수 있죠. 달리 말해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 역시 반드시 객관적인 현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녀의 경험도 장과 자크가 말한 진실처럼 현실의 한 파편에 불과할 수 있고, 그러면 그녀의 표정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됩니다.
마르그리트가 강간당한 직후 장이 "마지막으로 정을 통한 남자가 외간 남자이게 둘 순 없지"라고 말하며 잠자리를 강요하는 장면을 볼까요? 현재 관점에서 장의 행동은 명백한 강간입니다. 하지만 중세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장은 오히려 마르그리트를 보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날 밤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는데 마르그리트가 임신한다면 장은 그녀를 보호할 방법이 없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기사인 그가 마르그리트의 아이가 자크의 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가 마르그리트와 잠자리를 가졌기에 그는 훗날 태어날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일 수 있고, 아내의 명예와 진실을 지킬 명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장의 잠자리 요구는 엄연히 강간이 맞습니다. 보호할 의도였다고 해도, 본래 무뚝뚝한 성정인 것을 감안해도 강압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보호를 위해서라 하더라도 당사자인 마르그리트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점에서는 중세의 시대적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죠. 재판을 열기 위해 일부러 강간과 관련해 소문을 내는 결정도 유사합니다. 이 또한 현시점에서 보면 명백한 2차 가해입니다. 반면에 봉건제가 유지되던 중세 프랑스에서는 최선이자 동시에 필요악에 가까운 선택이죠. 이는 부부가 그날 밤을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이유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르그리트가 장의 영지를 돌보는 장면들도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이 꼭 현실일 이유는 없다는 걸 잘 보여줍니다. 얼핏 보면 이는 유능한 마르그리트가 장의 어설픈 영지 경영을 보완하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중세 시대임을 고려하면 이 역시 다르게 읽힐 수 있죠. 마르그리트는 씨암말의 씨를 가려 받으려는 장의 명을 어긴 하인에게 말들을 자유롭게 풀어줘도 된다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정해진 용도에 따라 말을 키우려는 장의 선택을 무시한 마르그리트의 선택은 오히려 큰 손실을 초래할 위험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중세의 말은 품종, 용도에 따라 가격이 크게 달랐는데 그녀는 이를 간과한 셈이죠.
전쟁에 나선 남편 대신 세금을 거두는 장면도 비슷합니다. 일견 영지를 관리하지 않는 장의 불성실함을 아내가 메꾸는 것 같죠. 하지만 영지를 내팽개치고 몇 달간 전쟁에 나간 장은 대가로 금화 300닢을 받습니다. 이는 마르그리트가 살림을 가꾸어 늘린 재정을 상회하는 수치죠.
당연한 명제: 진실은 마지막까지 신중히 결론 내려야 한다
영화는 이처럼 마르그리트의 진실과 당대의 현실이 어긋나는 장면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당장 마르그리트는 중세의 재판이 얼마나 끔찍한지 모른 채 고발에 나섰죠. 자신의 재판이 결투 재판인 것이나, 자신과 남편의 목숨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것 외에는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분명 영리하고 지혜로운 여성이지만 그녀의 진실 그녀의 주관대로 구성됐던 것이죠. 사건의 전말을 모두 담은 듯했던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조차도 온전한 진실은 아닙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3장의 도입부 연출은 마르그리트의 진실과 별개인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실이 또 따로 존재한다고 읽히기도 합니다. 결국 마지막 순간 그저 무기력할 뿐인 그녀의 표정은 그녀가 알고 있었던 진실과 알지 못했던 현실의 충돌로 인한 충격에 압도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죠.
따라서 <라스트 듀얼>은 억압받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시대적 관점에서 현실과 진실 사이의 괴리를 조명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분명 시대적, 사회적, 구조적 한계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죠. 그러면서도 사람의 진실은 언제나 왜곡될 수 있으므로 사건의 전모를 쉽게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도 같이 전달합니다. 세 주인공의 시선에 따라 작중 그 어떤 사건도 동일하지 않듯이요.
<라스트 듀얼>의 함의는 제작 비하인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제작 및 각본에는 리들리 스콧 감독 외에도 출연자인 맷 데이먼, 벤 에플랙, 그리고 여성 감독이자 각본가로도 활동 중인 니콜 홀로프세너가 참여했습니다. 초기 단계에서부터 데이먼과 애플렉이 남성의 시선을, 홀로프세너가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담당해 각본 작업을 진행했다고 알려져 있죠. 한 사건을 둘러싼 당사자들의 시각과 관점, 심정과 그들의 변화를 다채롭게 녹여낼 수 있었던 데는 이처럼 직간접적으로 미투 운동과 성추문 관련 이슈를 경험했던 이들과의 협업도 큰 역할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처음 코로나를 접했을 때 가장 시급한 일은 무엇보다 마스크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사기 위해 약국과 마트 앞에 길게 줄을 서야 했죠. 그때 마스크는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려진 만나와도 같았습니다. 생존의 동아줄이었죠.
하지만 마스크 수급도 안정되고, 원하는 순간 아무 데서나 마스크를 구매할 수 있는 순간이 왔을 때, 또 백신이라는 새로운 희망이 등장했을 때 마스크는 더 이상 생명을 지키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과연 마스크를 쓰는 것이 전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인지, 안 쓰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 다양한 논의가 시작됐죠. 물론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최소한 실내에서는 마스크를 쓰는 게 바이러스 전파를 막는 데 아주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찾아보기 힘듭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대다수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기준과 가이드라인에 합의하게 되는 그 과정에 있습니다. 마스크 착용의 효과와 관련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갑론을박을 벌인 결과 (최소한 한국에서는) 많은 시민이 동의하는 합의안이 도출되었죠. 마스크 착용이 과연 자유를 침해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포함되어 있었고요. 만약 무조건 마스크 착용만을 주장하거나 강제했다면, 그에 대한 어떤 반론도 허용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죠.
즉, 마스크 논란은 물론 모든 사회적 이슈에는 (보편적 인권이 침해받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성역이나 절대성도 없어야 할 겁니다. 그래야 구성원 모두를 위한 진정한 공익을 찾을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