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천히 읽을수록 많이 생각한다.
나는 무협지를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30대에 이른 지금까지도 무협지라면 사죽을 못 쓴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한번 꽂히면 자리를 뜨지 못한다. 어린 시절 TV를 틀면 늘 중국 무협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무협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험을 보면 가슴이 뛰었고, 그들이 성장하면 나도 성장하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보면 진부한 플롯의 반복이지만, 그 당시 나는 무협 속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나는 몇 번이고 다시금 빠져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무협 소설은 무협의 대부라고 불리는 김용의 작품들이었다. 그는 무협 소설 장르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린 무협 소설계의 신화였다. 판타지에 톨킨이 있다면, 무협에는 김용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의 작품인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같은 명작은 매년 버전을 달리하여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실제 중국 역사의 연대기에 따라 그려지는 그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한번 빠져나오지 못할 사막의 유사(流砂) 같았다. 나는 그의 작품들을 내리 탐독해 갔다. 탐독의 여정 중 만난 수많은 인물 중 유독 나의 시선을 끄는 한 인물이 있었다.
그 인물은 황상이란 인물이다. 사조영웅전이란 작품 속 가장 고강한 무공의 중 하나인 구음진경의 저자이다. 그는 주인공도 아니고 이야기 중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구음진경의 저자로서의 그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 나온다. 도교를 장려했던 송나라 휘종이 도가의 책 5481권을 모아 만수도장이라는 전집을 만들 때, 그는 목판을 새기는 인물이었다. 그는 한 글자라도 잘못 새기면 큰 벌을 받을까 두려워 온 정신을 집중하여 목판을 새긴다. 모든 도가의 경전을 한 글자 한 글자 세심하게 읽어가며 목판을 새긴다. 그 과정에서 도학의 정수를 깨닫고, 무학의 깊은 이치를 통달한다. 그리고 스승 없이도 큰 무공을 이루고 심득을 책으로 남긴다.
나는 황상이란 인물이 딱딱한 나무 목판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표면적으로는 나무 목판에 한 글자, 한 글자 손에 힘주어 새기는 과정이었겠지만, 그의 머릿속은 매우 분주했을 것이다. 머리 안에서 수많은 도가의 경전이 분해되고, 해석되고, 통합되며, 자신만의 앎으로 재조직화되지 않았을까.
아마 그는 이랬을 것이다. 경전 한 구절을 정성스레 새기며 그 구절의 의미를 깨닫는다. 다음 구절을 되새기며 앞의 구절의 깨달음에 의미를 보태고, 그다음 구절은 앞에서 얻은 깨달음을 심화시킨다. 수 천권의 도가 경전을 목각하며 이 과정을 셀 수 없이도 반복했을 것이다.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가히 가늠하기 힘든 그의 목판 새김을 통한 이해와 깨달음은 누구보다 깊었으리라.
이 과정은 경전을 마음에 새기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아니 영혼에 새기는 과정이었을까. 그에게 도가 전집 편찬은 반강제적인 임무였지만, 도가의 경전을 통달할 수 있는 ‘신중하게 계획된 진지한 훈련’이었을 것이다. 이런 느리고도 진중한 작업을 통해 그는 일세를 풍미할만한 내공을 얻었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김용의 무협 세계관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고 모두가 탐내는 저작을 탄생시켰다.
나는 황상이란 인물이 목판에 글자를 새겼던 방식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슬로리딩’가 완연히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슬로리딩’은 물리적으로 천천히 읽어나감을 의미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매우 활발한 읽기의 방법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처럼 책 안에서 달린다면, 눈앞에 지나치는 잔상만을 희미하게 기억할 뿐이다.
‘슬로리딩’은 정반대이다. 걷기의 독서다. 우리는 걸어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풍광을 눈과 가슴에 모두 담는다. 풍광을 바라보며 일어나는 감정과 마음의 변화, 생각의 변화를 천천히 관찰한다. 처음 보는 꽃을 만나면 눈으로 보고, 향기를 맡으며, 직접 손으로 만져본다. 길을 걷던 도중 새로운 길이 나오면 그 길을 따라가 보기도 한다. 그래서 ‘슬로리딩’이란 느리지만, 모든 것을 세세하게 파악해 나가는 방식이다. 느리지만 생산적이다. 바짝 붙어 읽고, 샅샅이 알아내어 많은 생각을 만들어낸다. 슬로 리딩은 송나라 문장가 구양수가 이야기한 독서 삼다(三多) 중 다상량(多商量)에 부합하는 독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