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모 -3년차, 어른 0년차
모든 경력에는 초짜의 시절이 있다. 그것이 설령 '어른 10년 차', '자취 10년 차', '마리모 집사 10년 차' 같은 취업시장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경력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사실 '10년의 세월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옛말과는 다르게 나라는 인간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았다. 스무 살의 나와 서른 살의 나는 둘 다 여전히 어른인 듯 어른이 아닌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나 그 애매한 것도 10년을 하다 보면 도가 트이기 마련이다. 10년의 세월을 거쳐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그런 애매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정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자체가 유의미했다. 이 글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어떻게 서른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초짜 시절의 이야기부터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직 주민등록증에 잉크도 채 마르지 않았을 적의 이야기이다. 어른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어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으로 경험했던 것들은 떠오른다. 첫 개강총회, 첫 술 파티, 그리고 첫 자취다.
첫 자취, 하면 대게 일종의 설렘 같은 감정이 떠오르기 마련이지만 내게 첫 자취에 대한 로망 같은 건 없었다. 당연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내 첫 자취는 재수로 인한 반강제 자취였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반수였다. 내가 현역으로 들어갔던 대학교는 내가 입학하던 그 해에 부실대학교로 선정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뭘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뭘 즐겨야 하는지도 몰랐다. 제대로 된 선배도 없었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학과 행사에 왜 참석하지 않느냐며, 화장실에서 나와 내 동기를 몰아붙였던 선배들뿐이었다. 그래서, 1학년 여름방학에 휴학계를 내고 재수학원을 등록했다. 그 근처에 나의 4평 남짓한 자취방이 있었다. 공간은 사람을 닮는다고 하던가. 그 자취방도 그 당시의 나를 쏙 빼닮았다. 쓸쓸하고 단출하고 검소하게. 자취에 신경 쓸 여유 따윈 사치니까. 바로 그것이 재수생의 기본 마음가짐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내게 어른이란, 곧 대학생이었다. 그러니까 어른이 되려면 대학생이 되어야만 했다. 본래 대학생이었으나 재수생으로 강등되어 어른이라는 칭호를 빼앗겨야만 했던 나는, 마치 복수를 위해 산 꼭대기의 한정된 장소에서 수련만을 거듭하는 무협인처럼, 한정된 장소만 오가며 공부에만 몰두했다. 그 시절의 내 활동 반경은 자취방과 재수학원,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언덕길이 다였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그 세 장소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재수 학원도, 자취방도 아닌 그 사이의 언덕길이니 말이다.
그 언덕길은 자취방에서 재수학원을 직선으로 잇고 있는 대로였다. 그 언덕을 평일이고 주말이고 매일같이 오르내리면서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어떤 순간들에 대한 감각은 남아 있다. 이를테면 가을날의 차갑고 쓸쓸한 공기, 언덕을 오르며 뻐근했던 종아리, 그 당시에 즐겨 들었던 악동뮤지션의 '시간과 낙엽들'과 에픽하이의 'amor fati' 같은 노래들 말이다.
그리고 사이비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재수학원 근처에는 사이비들이 많았다. 게다가 그 당시의 내 용모는 누가봐도 재수생이었다. 무릎이 헐렁한 회색 체육복 바지, 기를 펴지 못하고 푹 숙인 얼굴, 힘없는 발걸음. 아, 이 3종세트라면 없던 사이비도 생겨나서 포교 활동의 꿈을 펼쳐봄직한 것이다.
그들은 특히 일요일에 활발히 활동했다. 마치 겨울철엔 보이지 않다가 여름철만 되면 자연발생하는 초파리들처럼, 일요일만 되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내게 말을 걸었다. 눈 마주치면 무조건 배틀해야만 하는 포켓몬스터 npc처럼, 집으로 가는 길은 정해져 있었고 난 그들을 피할 수 없었다. 내가 만난 사이비 npc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해 보면 이렇다.
가장 핫한 유형이자 동시에 대중적으로도 가장 잘 알려진 유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우선 칭찬부터 하고 보는 '칭찬봇'으로 마음이 허한 이들의 빈틈을 노린다. 내가 본 칭찬봇은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영업맨 대머리 아저씨였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전형적인 슈트케이스를 들고 뻣뻣한 자세로 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던 그 아저씨는 나를 보자마자 갑자기 경로를 45도로 틀어 내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대뜸 앞뒤 다 자르고 하는 말이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였다. 처음으로 만난 사이비가 그 아저씨라 정말 다행이었다. 그 아저씨의 전형적인 멘트 덕에 나는 첫 만남부터 사이비를 나름 수월하게 간파해 낼 수 있었으니까. 그 아저씨는 이후로도 날 두 번이나 봤는데 매번 처음 보는 사람인 것 마냥 나를 향해 경로를 틀었다. 항상 대로변을 중심으로 오른쪽 인도에서만 걸어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난 왼쪽 인도로만 다녔다. 멀찍이서 아저씨를 관찰하고 있자니 살짝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저 아저씨, 저렇게 해서 과연 성과가 나오기는 하는 건가. 그런 연민의 마음은 재수생으로서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이기도 했다.
이 유형은 자연스러움을 가장한다. 본인은 그저 갈 길을 가고 있었을 뿐인 척한다. 내가 본 사람은 대학생 남자였고 그 자연스러움을 가장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서 있어야만 하는 횡단보도를 노렸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대뜸 내게 "학생이세요?"하고 물었다. 이미 사이비에 이골이 난 덕에 난 얼른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다. 처음에는 아, 그렇구나... 하고 그냥 지나치려던 그 남자는 아무리 봐도 내 말이 거짓말인 것 같았던 모양이었다. "정말 학생이 아니라고요?" 하고 재차 물어보던 그 남자. 나도 이를 악물고 학생이 아니라고 했더니 그제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사이비 경험자였기에 망정이지 까딱 잘못해서 학생이었다고 말했다가는 그 자전거를 탄 기동전사를 집 앞까지 달고 갈 뻔했다. 마주 오는 것도 아니고 나와 나란히 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던지라 무시하며 지나쳐갈 수도 없었던, 꽤나 머리를 쓴 전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보통 2인 1조로 다닌다. 그리고 보통은 둘이서 한꺼번에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하지만 그날 내가 겪은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 조는 어떤 아줌마와 뿌까머리를 한 덩치 큰 여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마도 표교활동의 첫 트레이닝 같은 걸 시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아주머니가 날 보더니 뿌까머리 여학생의 등을 툭 밀었다. "피카츄, 공격!" 뭐 그런 멘트를 하지 않았을까 싶은 장면이었달까. 굉장히 발랄한 걸음으로 내게 달려오던 그 뿌까머리 여학생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물론 난 여학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재빨리 그 공격을 피했다. 다회차의 사이비 경력 덕분에 습득한 회피 기술이었다.
나는 일요일마다 그런 일련의 이벤트를 겪고 나서야 목적지인 자취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지금이야 이런 일들을 웃어넘기며 말할 수 있지만 그땐 그들을 마주쳐야만 하는 게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 일이 나 자신에 대한 문제로 비약되기까지 했다. 내가 너무 우울해 보이나, 아니면 만만하게 보이나 이런 자책이 따라붙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난 학원에서 겉돌고 있었다. 반수를 하려고 들어온 학원에는 이미 친한 무리들이 정해져 있었다. 고정된 무리에 자연스레 끼어본 경험이 없었던 나는 도저히 기를 펼 수가 없었다. 하루는 어떤 남자애의 시계가 없어진 일이 있었는데 내가 혼자 강의실에 있었던 것 같다는 이유로 범인인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물론 내 앞에서 나를 콕 집어서 부른 적은 없었고 그런 식으로 속닥거리는 것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게 더 고역이었다) 다행히 바로 다음 날 그 시계는 그 남자애의 집에서 발견되었지만 나로서는 그 일로 마음이 참 힘들었다. 내가 그렇게 음습해 보이나. 나도 친구들이랑 있으면 얼마나 활달한데. 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왜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했지. 이런저런 억울함과 분노가 뒤엉켰다.
그래도 그 시간들이 다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말을 제대로 섞어본 적은 없지만 늘 맛있는 간식을 가져와서 나에게 슬며시 나누어주는 언니가 있었다. 나도 그 언니를 위해 새콤달콤 같은 것을 일부러 사 와서 그 언니에게만 나눠주고는 했다. 그리고 그 언덕길에서 아침마다 늘 마주치던 여자도 있었다. 특정 구역에서 아마도, 회사 셔틀버스를 기다리던 회사원이었던 것 같았는데 어느 날 그 여자가 날 보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해 줬다. 그 낯선 사람의 호의에 크게 감동해서 그날 이후로 나도 일부러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가 내가 먼저 인사를 하곤 했더랬다.
그러나 언젠가, 마음이 정말 우울했을 때는 그 여자의 인사를 애써 모른 척한 적도 있었다. 그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고 싶지 않은 그런 날이었다. 그 일을 기점으로 서로 서먹해지고 난 후에는 그 여자와 예전처럼 인사하는 날도 적어졌다. 그래도 수능을 다 보고 그 언덕을 떠나야만 했을 때에는 그 여자에게 비타 500 같은 거라도 건네주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날 그 여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결국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셈이었다. 그 사람은 지금쯤 무얼 하면서 살고 있을까. 그 당시엔 대체 어떤 마음으로 내게 먼저 고개 숙여 인사했던 것일까.
그리운 순간이라 할 수도 없고 잊고 싶은 순간이라 할 수도 없는 모호한 무채색의 장면들이 그 시절에 갇혀 있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시간들이지만 왜인지 그때의 장면들을 떠올리다 보면 먹먹해진다. 풀 수 없는 궁금증만 남겨둔 채 난 그 동네를, 그 자취방을, 그 언덕을 영영 떠났다. 그것도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내 인생의 목표는 더 이상 '수능 잘 치기' 같이 단순한 것이 아니었고, 대학생이 곧 어른이라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다. 심지어 '대학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꼰대 같은 말도 진심을 담아 하고픈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아주 다른 사람인가 물으면 그렇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때 잔뜩 긴장한 채 그 언덕을 오르내리던 그 아이가 여전히 내 안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과는 달리 10여 년 전의 그 시절, 나는 원하는 대학에 붙었고 이제 진짜 어른이 된 것만 같은 기쁨에 젖어 있었다. 나는 멋지고 활달한 어른이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재수학원 사람들이 보고 깜짝 놀랄 정도로 성공한 어른말이다. 그런 어른이 된다면 사이비 같은 것도 꼬이지 않을 것이었다. 과거의 나는 사라지고 완전히 달라진 나만 남겠지. 나는 내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노라 믿었다. 내가 꿈꾸던 삶이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