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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모 일기 1 | 내 반려이끼가 가짜라니

제1장 프롤로그

by 뺑또

어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교 친구로부터 마리모를 선물로 받았다.

이름 없는 '마리모'로서 키워지던 그 마리모의 정체를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제야 마리모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아래는 그 당시의 실제 기록이다.






2020년 5월 20일.


마리모를 키운 지도 3년이 훌쩍 지났다.



어항을 찍은 것이 아니다.

저 어항 밑바닥에 찌그러진 까만 돌처럼 보이는 게 나의 4년생 마리모다.

이름은 딱히 없었지만 편의상 막시무스라고 부르기로 하자.






우리 막시무스는 내 생일날 친구들이 선물해 준 예쓰(예쁜 쓰레기)였다.

먹이를 준다든가 관심을 가지고 이름을 불러준다든가 잘 자라고 자장가를 불러준다든가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생각날 때면 물도 갈아주고 이사 갈 때도 나름 고이고이 챙겨 왔었더랬다.


무엇보다 3년 동안 내 책상 위에서 마리모로서 키워지고 있었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그런데 어느 날 막시무스의 어항에 물을 갈아주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 진짜 자라고 있는 거니?





마리모는 원래 1년에 1cm는 자란다던데 막시무스는 작아도 한참 작았다.

마치 시간이 3년 전에서 멈추어버린 것처럼...


처음에는 막시무스의 성장부진을 걱정해서 마리모 먹이를 사려고 했다.

마리모가 자라지 않는 이유도 검색해 봤다.


그러다... 가짜 마리모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가짜 마리모라니...

100년 동안 키우는 인생의 반려이끼, 마리모를 플라스틱 수세미 재질로 따라 만들어서 살아 있는 척, 광합성하는 척 속이다니...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걸 위해 몇 십 년간 물을 갈아주게 하다니...


그 가짜 마리모를 애지중지 키우다가 몇십 년의 세월이 흘러 호호할머니가 되어서도 어항에 물을 갈아주고 몇 년간 꼬박꼬박 마리모 밥도 넣어 주다가 죽을 때쯤 손녀한테 이건 내 유품이니 잘 간직하거라... 하고 플라스틱 덩어리를 대대손손 넘겨주게 만들다니...


세상에 이런 악덕시장이 정말로 실재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런 가짜 마리모가 아주 많다고 한다.

마리모는 원래 물이 차가운 유럽이나 일본에서 수입되어 오는 것인데

날씨가 더운 동남아시아에서 수입되는 경우가 있고

그런 것들은 가짜 마리모라고...



느낌이 싸했다.

가짜가 있다니.

게다가 많이 있다니...



그때부터였다.

내 책상 위의 막시무스가 생경하게 보였던 것이...






인터넷의 가짜 마리모 구별 후기들을 다 뒤졌다. 여기저기에 카더라가 속출했다.

가짜 마리모를 태우면 플라스틱 타는 냄새가 난다, 가짜 마리모를 뜨거운 물에 끓이면 갈색으로 갈변하지 않고 푸르뎅뎅하다 등등...


그러나 그 어디에도 진짜 마리모로 그런 실험을 한 예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카더라가 사실이 되려면 짜와는 달리 진짜 마리모를 태우거나 뜨거운 물에 끓였을 때 어떤 식으로 된다더라, 하는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증거는 아무 데도 없었다.


게다가 사람마다 말도 다 달랐다.

어떤 사람은 마리모를 끓는 물에 넣는다고 해서 갈색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마치 시금치를 데쳐도 파란 것처럼 말이다.





나도 우리 막시무스를 그런 식으로 뜨거운 물에 처형할 수는 없었다...

3년간의 세월이면 아무리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사이보그 막시무스라 할지라도 진짜 마음을 지닐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한 번 나 혼자 막시무스의 정체를 간파해 보기로 했다.




1. 막시무스의 질감은?



말랑말랑하다. 굉장히 말랑말랑하다. 맘만 먹으면 호떡처럼 납작하게 누를 수도 있을 것 같다.

뭔가 솜뭉치 같다. 속이 빈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어떤 사람에 의하면 말랑말랑하다고 다 가짜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질감으로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2. 막시무스의 냄새는?


쾌쾌하다. 플라스틱 냄새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살면서 한 번도 물에 젖은 플라스틱 냄새를 제대로 맡아본 적이 없다.

게다가 내 어항 속 조개껍데기에 시퍼렇게 끼어 있는 녹조류를 감안했을 때

3년 동안 몇 주 간격으로만 환수되는 물속에 있다 보면

아무리 무생물 플라스틱이라 할지라도 물에 젖은 퀴퀴한 생명의 냄새가 날만 했다.



3. 막시무스를 조금 뜯어봤다


결국 막시무스를 아주 살짝 뜯어봤다.

솜뭉치를 떼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솜 같았다.

납작하고 얼기설기 뭉쳐져 있는 것이 꼭 천 조각을 조금 뜯어낸 것 같았다...


나는 막시무스의 조각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마리모는 직사광선을 받으면 누리끼끼해지면서 죽는다고 하니까

햇빛이 잘 비치는 곳에 놓아두고 지켜볼 예정이었다.

진짜라면 바싹 마를 테고 가짜라면 푸르딩딩하겠지...





근데 너...

너무 신난 거 아니니?


생각해 보니 막시무스는 꽤 자주 떴다.

원래 마리모는 끽해봐야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뜬다던데

우리 막시무스는 물 갈아줄 때 조금 만져만 주면 저렇게 두둥실 떠오르곤 했다.

그때도 그걸 보고 아, 저거 속에 공기가 차서 저렇게 뜨는 거구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광합성해서 떠올라야 정상인데 속에 공기 찼다고 떠오르는 너...

제발 아니라고 해줘...



그렇게 다음날 아침

막시무스를 확인해 봤다.






-----푸르딩딩-----


막시무스...요녀석...

Suseme...였구나...?






아직도 기분이 좋구나...?

밤에도...광합성을 하는구나...?

그래...



어제부터 배신감이 들기는 했지만

나는 막시무스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사실 막시무스는 아무 잘못이 없다.

막시무스를 애완 수세미로 안 팔고

애완 마리모로 판 그 사람들 잘못이다...



괜찮아, 미리 심리적 안정망을 설치해 뒀으니까...


사실 막시무스를 조금 떼어내 휴지조각에 올려놨던 그날 밤,

인터넷에서 1년생 마리모를 구매해 두었다.


막시무스가 가짜일 것이 판명 나더라도 어항 속에 진짜를 넣어두어서 공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함이었다.





새로 주문한 1년생 마리모(왼)와

3년 동안 키운 막시무스(오)


이렇게 비교하니 확실히 막시무스가 왜소한 게 한눈에 보인다.

절대 4년생 마리모라고 볼 수가 없다.

이쯤 되면 확인사살 수준...


나는 막시무스와 새 마리모를 함께 키우기로 했다.

새 마리모에 수세미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이젠 1년 뒤에 수세미가 수세미로 판명될지라도

수세미는 계속 수세미일 수가 있다.





그렇게 막시무스와 새 마리모, 수세미의 행복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둘도 서로가 좋은지 꼭 붙어 다닌다.






앞으로 막시무스와 수세미가 함께 이 어항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가식과 거짓이 난무하지 않는 진실된 세상 속에서 살 수 있기를...


처음 막시무스를 의심하기 시작했을 만해도

이 사건이 어떻게 끝날까 걱정했는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어 다행이다.

세미도 조금 뜯어서 실험을 해 봐야 하나 했는데 그런 머릿속 마구니는 떨쳐버리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저 두 아이들이다.

나는 앞으로도 이 마리모들을 적절히 방치해 두면서

생각날 때마다 물을 갈아줄 것이다.


1년 후, 5mm 자란 세미와

여전히 4년 전 모습을 간직한 막시무스를 기대하면서...



당시 실제 포스팅과 댓글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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