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모 -1년 차, 어른 2년 차
시간은 흘러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다시금 여름이 찾아오자 지난해의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또 바선생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을 졸여야 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대학교 2학년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면 멋진 어른이 될 것이라던 재수생 시절의 포부와는 달리 막상 대학생 타이틀을 단 나는 조금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사방에 나보다 어른스럽고 멋진 사람들이 천지였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이 참 의아했다. 아니 대체 저 사람들은 어떻게 교육을 받았기에 저런 그럴싸한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신기하지 않은가.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칠판에 적힌 답을 외우는 주입식 교육만 받으며 수능문제의 객관식 답을 알아맞히는 데에만 골몰했던 이들이 대학생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갑자기 손을 척척 들어 발표도 하고 창의적인 문제 해법을 찾아내며 자기 자신을 프레젠테이션 했다. 심지어 아주 능숙한 척했다. 이미 예전부터 그런 역할을 잘 해내왔다는 듯 열심히 어른을 연기했다. 그리고 그 연기가 그 나이 또래들 사이에서는 제법 통했던 것이다. 나는 그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갔다. 그래서 나도 그들처럼 되어야만 했다. 그럴싸한 어른말이다.
- 말을 잘해야 한다
- 쿨해야 한다
- 유머감각이 있어야 한다
- 프로페셔널해야 한다
- 당당해야 한다
- 그럼에도 인간미가 있어야 한다
내 이상은 높았다. 상상 속의 내 모습은 사람들을 통솔하고 모두에게 신뢰받는 멋진 어른이었으니까. 하지만 왜 나의 상상은 현실이 되지 못했던 것일까? 안타깝게도 현실의 나는 내가 세운 '어른'의 기준에 한참 미달했다. 우선 나는 말을 잘하지 못했다. 말을 꺼냈다가도 종착지를 찾지 못해 어영부영 뭉뚱그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쿨하지도 못했다. 내가 했던 말이나 행동이 밉보였을까 봐 전전긍긍했고, 다른 사람들이 했던 사소한 말을 곱씹곤 하는 아주 피곤한 성격이었다. 유머감각도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에야 발휘되었지 막상 잘 보여야 하는 어른 앞에서는 잔뜩 경직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프로페셔널할 수도 없었다. 대관절 어떻게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프로페셔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인정욕구 때문이었던 것이다.
운이 좋게도 학회의 회장 자리를 제안받았던 때도 그랬다. 내게 그 제안을 했던 전 회장 선배는 부담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거절해도 된다고 말하긴 했지만 은근히 제안을 받아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많지 않은 학회 구성원 내에서 회장을 할 사람을 찾는 일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하겠다고 했다. 선배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가진 이력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던 2학년 생에게 꽤나 고마운 제안이었던 것이다. 취업할 때 한 줄이라도 더 적을 수 있다는 생각에 부담감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회장을 하면서 동기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아."
그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도 그렇게 학회를 운영했다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뭐든 척척 잘 알아듣는 똑똑한 후배인 척했지만 막상 학회 회장으로 활동했던 1년의 기간 동안 내 동기들에게 도와달라는 얘기를 하지는 못했다. 내게 주어진 문제를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 자체가 꺼려졌다. 그 당시의 나는 으레 발표도 잘하고 교수님들과도 잘 지내는, 그 당시만 해도 어마어마한 어른처럼 보였던 선배들처럼 나도 학회 하나쯤은 거뜬히 혼자서 척척 운영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남에게 도와달라 말하는 것은 곧, 내가 문제 하나 혼자 해결하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수치스러운 일일 뿐이었다. 나는 내 체면을 구기는 것이 두려웠다.
상황이 그러하니 문제가 생기면 끙끙 앓기만 할 수밖에. 내향적이고 걱정 많은 성격임에도 사람들 앞에 서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사람들을 관리하고, 커리큘럼을 짜고, 축제를 진행하는 일이 전혀 버겁지 않은 척 스스로를 속일 수밖에. 결국 그 스트레스의 반동으로 자체 휴강을 밥먹듯이 하며 2학년 학업 생활을 등한시한 결과, 학점을 죽을 쑤고 말았다. 그 업보를 비싼 계절학기 재수강으로 청산해야 했으니 내겐 꽤나 값비싼 인생수업이었다 할 수 있겠다.
사실 내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불안도 나약함도 아니었다. 바로 무지였다. 나는 나 자신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MBTI는 알았다. 그 성격 유형에 속해 있음으로서 나 자신의 성격을 남에게 인정받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 바람대로 되려고 노력했고 노력만 하면 뭐든 다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나를 잘 몰랐다. 내가 얼마나 불안한 사람인지 잘 몰랐다. 그 불안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사회가 규정하는 가장 '성공적인 어른의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기 바빴다. 그래서 마치 애니메이션 속 빨간 머리 주인공들처럼 나도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쿨하고 당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학창 시절의 그 불안하고 소심한 아이가 대체 어딜 갔겠는가. 재수생활을 하던 시기에, 그 누구에게도 말 한번 제대로 붙여본 적 없었던 그 사람이 바로 나 아니었던가.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싫었던 거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그렇게 어른스러워 보였던 대학생들도 사실은 정말 어렸다. 다들 어른 행세를 하면서 잔뜩 허세를 부리기도 했고 휩쓸리고 방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사회 속에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감당 가능한 범위를 알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 학회의 회장을 맡았던 1년여의 기간도 내게 그런 기능을 해주었다. 이런저런 일에 부딪히면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어렴풋하게나마 구분 지을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그래도 그 시절이 마냥 서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 취향이라는 것은 알아가고 있었으니까. 늘 어색한 송충이 눈썹만 그리던 내가 이젠 제법 내 취향의 화장법이라는 것을 터득했다. 옷 스타일도 확고해져서 이젠 백화점에 걸린 옷을 보고 내 스타일인지 아닌지를 바로 알아볼 수도 있었다. 좋아하는 인디게임이 생겨서 밤새 게임을 하기도 했고, 인디 밴드에도 푹 빠져서 평생 다닐 콘서트를 원 없이 보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정하던 사실을 하나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엄마를 참 많이 닮았다는 거였다. 머리 스타일도, 옷 취향도, 덕질 대상도 말이다. 그전까지는 대게 10대의 청소년들이 그러하듯, 엄마의 취향은 마냥 올드한 것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다른 사람들과 나를 구분 지을 수 있는 취향을 찾아낸 덕분이었다. 그러니 내가 나 자신을 싫어하고 있는다는 것은 몰랐어도,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말할 수는 없었어도, 나는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설명할 수는 있었다. 나 자신을 차차 알아가고 있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