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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문지방을 넘어선다는 것

by 샐빛

하노이에 와서 코로나의 장벽이 걷히고 아이가 등교를 시작한 후 가장 먼저 하기로 결심했던 일은 베트남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나는 사실 굉장히 내향형인 인간이라 사람들을 만나거나 새로운 모임에 들어가는 일 등을 반기는 성격이 아닌데, 이상하게 새로운 환경을 맞닥뜨렸을 때는 새로운 에너지가 샘솟는 것을 느끼곤 한다. 베트남어를 배우기로 한 것도 그런 일 중의 하나였다.


외국어 하나 배우는 일이 뭐 그리 대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일단 하노이에 아는 사람이 남편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없던 시점이라 남편과 아이가 나가고 나면 덩그러니 혼자 집에 남겨져 있었던 때였다. 다 무섭고 낯설어서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가는 것도 어려웠던 때였었지만, 우연히 본 블로그에서 베트남어 스터디가 있다는 포스팅을 본 후 주저 없이 쪽지(?)를 날려 참가 의사를 밝혔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잘 모르겠다.


좀 무료했던 것 같기도 하고 뭐라도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한데 무엇보다 밖에 나갔을 때, 거리의 간판을 하나도 읽을 수가 없고 사람들의 말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눈을 뜨고 있는데 아는 글자가 없고, 귀와 입이 열려 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번역기를 들이밀어야 하는 내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다. 오히려 영어권 국가였다면 차라리 좀 나았을 텐데 살면서 이런 무력감을 느낀 것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물론 한인촌에 있으면 베트남어를 못해도 전혀 문제가 없고 사람들이 주로 가는 관광지 주변이나 유명한 식당에 가면 영어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도 아니니까 이래저래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베트남어를 시작했고 베트남어 기초를 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베트남어는 성조가 6개인데, 성조에 따라 발음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똑같이 생긴 글자라도 6가지의 뜻이 있어서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면 상대방이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게다가 공부를 하는 것만큼 사용을 해야 실력이 늘어날 텐데 역시나 내향적인 성격은 언어를 배우고 활용하는 데 큰 걸림돌이어서 밖에 나가도 쑥스러워서 베트남어를 써보지 못했다. 틀려도 자신 있게 말해보고, 왜 틀렸는지 물어보고, 오늘 배운 한 마디는 오늘 안에 꼭 써보려고 노력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저 안으로만 채워 넣고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나의 베트남어는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초반에는 단어를 좀 알게 되다 보니 간판도 읽고 메뉴판도 읽을 수 있게 되어서 좀 재미있더니 간단한 인사말, 주문할 때 쓰는 말 정도 외에는 그다지 사용할 일이 없게 되면서 베트남어를 배워도 쓸모가 없는 것 같고, 점점 이걸 내가 왜 배우고 있나 싶어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시 목표를 잃어버린 나는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다시 어슬렁거리며 새로운 목표를 찾다가, 한국어교원 자격증에 꽂히고 말았다.


한국인에게 우호적이고 한국문화에 열광하며 한국어를 배우는 데 누구보다도 진심인 베트남에서 한국어교원 자격증이 있다면 뭐라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국에 있을 때 이미 대학원에서 한국어교육 석사학위까지 획득하여 2급 자격증을 딴 친구를 통해 한국어교원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그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미 차고 넘치는 교원 수에 비해 일할 자리가 없어서 석사까지 한 친구도 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베트남에 와 있으니 이곳에서라면 쓸모가 있겠다는 생각에 꽂히면서 금방 딸 수 있는 한국어교원 3급 자격증에 도전하기로 했다.


시험에 특화된 유전자라도 있는지, 시험공부를 하면서 다시 활력을 찾았고 한국 방문 일정 중에 필기시험을 치러 합격한 후 대면 면접을 위해 혼자 1박 2일의 한국행까지 감행하면서 결국 3급 자격증을 획득했다.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한국어 학원에서 강사를 구하거나, 페이스북만 뒤져도 언어를 교환하자는 베트남인들이 넘치는 현지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은 채 아직까지 내 한국어교원 3급 자격증은 조용히 잠자고 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눈앞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는 최선을 다하는데, 그러고 나서 그 이후에 스스로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할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나의 관문이자 이걸 깨지 못하면 나는 내 세계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겠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처음엔 그저 내향적인 성격 탓으로 돌렸고 지금 당장 뭘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합리화도 해봤고 나는 노동 비자로 온 것이 아니기에 함부로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도 대봤지만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책상 앞을 벗어나는 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책상 앞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공부하는 것은 좋은데 책상 밖을 벗어나 내가 가진 것을 통해 새로운 일을 시도해 보는 것은 몹시 두렵고 어렵다. 잘하지 못할까 봐 무섭고 그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준비하고 노력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귀찮아서 결국에는 책 뒤에 숨어 그래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며 안주하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핑계를 대고, 이유를 찾고, 또다시 도망치고 있다.


이삼십대를 그렇게 살아온 것을 후회하면서도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벌써 40대 중반을 지나는 나이가 되다 보니 어떤 것이 맞는 건지 잘 모르겠기도 하다.


나의 성향을 인정하고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 나의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맞는 건지, 더 늦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도전해 보고 부딪쳐보고 깨져보면서 나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확장해 보는 것이 맞는 건지 말이다. 무조건 꿈꾸고 도전하는 인생만이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채로 늙어가는 것도 싫으니 말이다.


쓰고 보니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싶은데 그게 요즘 나의 큰 고민 중에 하나다.


하노이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의 장기, 기술을 살려 일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너무 대단해 보이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서 하지 못하니 답답한 것이다. 이런 성격이면서 도대체 왜 자꾸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은 드는 것인지. 사춘기도 아니면서 왜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건지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생겨먹은 것인지 제발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지만 그걸 누가 알려주겠는가, 그만 하겠다고 찢어버리던지, 끝까지 스스로 풀어내보던지 어느 쪽이든 결정하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내 인생의 숙제겠지.


그런 의문과 답답함을 가슴 한편에 품은 채 올해부터 친구와 함께 새롭게 베트남어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또 배우기만 하고 있냐.... 고 하시겠지만 그렇다.)

현지인인 선생님도 나의 이런 성향을 파악하셨는지 교실에서는 열심히 잘하면서 왜 밖에서는 말을 못 하냐며 매 수업시간마다 어제는 베트남어를 써 봤느냐고 물어보신다.


그래도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전처럼 내 안으로 쏟아 넣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밖으로 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


베트남어를 곧잘 쓰는 친구와 함께 수업을 듣다 보니 이전보다는 좀 더 즐겁게 공부하고 있고, 입을 잘 못 떼는 나에게 무조건 베트남어를 쓰게 시키는 친구덕에 그래도 조금은 더 말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다니는 학원에서도 한국어 강좌가 있기 때문에 조금의 연(?)을 만들어 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다. 온라인 회화 프로그램의 강사로 도전해보거나 정 안되면 유튜브 쇼츠나 한국어 강좌 채널 등 다양한 루트도 생각해 보고 있다.


여전히 당장은 계획이 없고 무엇인가를 시도해 볼 용기가 샘솟지는 않지만 해 보고 싶다는 방향성은 가지고 가 보려고 한다. 그 방향으로 가속 페달을 밟을 수 있을지, 브레이크로 페달로 발을 옮기고 두 손을 들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계획한다고 계획대로 되는 게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쉽게 포기하거나 급하게 밀어붙이지는 않으려 한다. 옛 어른들이 문지방 밟으면 복 나간다고 했는데, 저 멀리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 있을 나에게 맞는 방향을 찾기 위해 내 세계의 문을 열고 문지방 위에 올라서서 오늘도 길게 목을 빼고 두리번 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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