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15개월을 등록했던 헬스장의 요가 프로그램이 끝나고 새롭게 16개월간의 계약을 갱신했다.
(1년을 계약하면 추가로 3~4개월을 더해주는 프로모션 덕분에 계약 기간이 늘어났다.)
친분이 있는 아이 친구 엄마의 소개로 아파트 헬스장에서 새로 개설된 요가 수업에 참여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 하고도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것이다. 뻣뻣하기 그지없이 나무토막 같던 내 몸이 점점 유연해지는 시간 동안, 한 공간에 있던 사람들과의 친분도 점점 쌓여갔다.
새벽부터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베트남 사람들은 대부분 5시 반 수업에 참여하기에 8시에 개설된 수업은 대부분 한국 아줌마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헬스장이다 보니 회원들 역시 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초반에는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미 서로 친분이 있어 보였기에 크게 어울리지 않고 운동을 마치면 바로 집에 돌아가고는 했었다.
하지만 작은 GX실에서 일주일에 2번씩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땀을 흘리다 보니 요가 수업이 끝나고 종종 가벼운 티타임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그녀들과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졌다. 최근 계약을 갱신한 이후에는 종종 외부로 식사를 함께 하러 나가기도 할 정도로 친목을 다지는 사이가 되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아이들이 대부분 같은 한국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학년이나 나이가 같지 않아 이해관계가 얽힐 일이 없고,
요가 수업을 중심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보니 개인적으로 연락하기보다는 단체로 만나고 헤어지는 게 다인 관계여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부담도 덜한 편이라 내향적인 성향의 나도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그녀들과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하고 있다.
그렇게 그녀들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이야기를 나눠보면 나눠볼수록 생각하게 되는 게 많다.
누군가에게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남편 때문에 한국을 떠나 베트남으로 왔다.
고향도 다르고, 자란 환경도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결혼 전 직업도 다르다.
베트남에서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남편들의 직업도, 일하는 지역도, 당연히 월급도, 사는 방식도 형편도 다르다.
이곳에 당분간 있을 사람, 계속 있을 사람, 언제까지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사람까지 뭐 하나 같은 게 없다.
서로의 신상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르는 채 가까운 사이가 되어가면서 대화를 하다 보면 은연중에 자기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마련이고, 그 얘기들은 자신의 환경에 국한된 경험이다 보니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럴 때마다 깜짝 놀라게 되는 일도 종종 있고 그렇게 애쓰며 살아온 이야기에 걱정과 경외심이 들 때도 있지만 그것이 너무 당연한 것도, 너무 이상한 일도 아니라는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마음과 표정과 입을 단속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가끔은 나 역시 내가 살아온 환경 속에서 경험한 것들이 전부이다 보니 스스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말하고 나서 아차 싶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기에 상대방의 얘기에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되는 것도 맞지" 하며 맞장구를 치고는 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는 이렇게 살아왔어.'
'나는 이만큼은 해내고 살았어.'
'나는 이 정도는 누리고 살았어'
라는 알량한 우월감을 티 내고 싶어 하는
내 안의 작은 악마를 느낄 때마다 흠칫 놀란다.
대단한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너보다는 내가 조금 나은 것 같다며, 그걸 스치듯 잠깐이라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느낄 때마다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 안에서 달려 나가려는 '말'들을 끝까지 잘 붙들어 두는 횟수가 늘어나는 것에 속으로 안도하고는 한다.
지금보다 어렸을 땐, 하고 싶은 말을 잘 참지 못해 잠자리에 들기 전 이불킥을 하는 일도 많았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그때보다는 조금 더 살았다고
많이 유연해지고 참을성도 길러진 거 같아
짐짓 대견하면서도 여전히 조심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다.
굳이 불필요한 말은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불필요한 반응은 하지 않고 그저 들어주는 일,
그걸로 충분하다는 걸 잊지 말자.
오늘 아침, 또 한 마리의 '말'을 놓친 건지, 잘 붙들어 둔 건지 모를 애매한 티타임을 마치고 나서 다시 한번 나를 다잡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1년 3개월의 수련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1년 4개월 후에는 좀 더 나아지길 바라며.
내일도 나마스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