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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삐 May 12. 2022

비혼은 혼수품이 없다

내 삶은 현재 진행형 6

“장설파마후참깨(고추장-된장-간장, 설탕, 파, 마늘, 후추, 참기름, 깨소금)” 

요리할 때 언제나 고등학교 가정 시간에 선생님이 알려주신 마법의 양념 조합을 읊는다. ‘후추는 옵션이지’라며 착각 속에 처음 여섯 달을 살았다. 육 개월 내내 후추가 빠진 양념 송을 부르다가 이제는 오십 번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 동기에게 집들이 선물로 후추를 사달랬다. 

겨우 후추가 내 인생의 질을 그렇게 올려줄지 몰랐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괜찮다고 부엌 용품들을 미룰수록 내가 할 요리 역시 언젠가로 더 미뤄졌다. 그만큼 내가 할 수 있는 요리의 역시 한정됐다. 감자전 한 번 해 먹으려다가 1인용 스무디 믹서기에 네 번은 나눠서 갈고 손바닥만 한 국자 크기의 채반에다 물을 빼느라 세 시간이 걸렸다. 큰 사이즈의 믹서기와 채반을 짝꿍으로 들여놓았다. 실리콘 스파츌라는 덤이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커다란 믹서기는 감자전은 세 시간이 아니라 한 시간이 걸리는 음식임을 마음껏 뽐냈다.

 

‘아… 요리는 도구빨이다.’


베이킹 용품, 휘핑기, 마늘 분쇄기, 그라인더, 빵칼 그렇게 요리 용품이 늘어 날수록, 나의 요리 세계 역시 넓어져 갔다. 


그렇게 새로운 재료들이 내 손에 들어왔다. 마늘 분쇄기 덕분에 처음으로 쥔 통마늘에는 옅게 보랏빛과 분홍빛이 돌았다. 갓 깐 마늘은 원래 알던 노란빛이 아닌 아이보리에 가까운 하얀 빛을 띄었다. 다진 마늘과 깐마늘에서 나는 묶은 내 대신 산뜻한 마늘 향이 났다. 그라인더는 레몬 껍질을 빵 위에 토도독 떨어트렸고, 빵칼은 캄파뉴의 바삭한 겉껍질의 버서석하며 소리를 냈다.

 

후추 없이 살았던 과거의 내가 대단하다 느껴질 정도로 이제는 선반에 통후추, 파슬리, 바질, 시나몬 파우더, 오레가노, 뉴트리셔널 이스트, 파프리카 가루 등이 한가득 들어차있다. 있으면 좋은 도구들 부엌 용품들은 어려운 요리들을 더 간편하게 만들 수 있게 했다. 그만큼 나를 위해 요리하고 내 몸을 챙기며 먹이게 되는 시간이 늘었다. 해외를 다녀오면 지역 소금이나 향신료를 사 모으는 소소한 취미 역시 생겼다. 


인터넷에서 최저가로 산 프라이팬의 코팅이 벗겨지기 시작하면서 몸을 위해 스테인리스 팬으로 바꿨다. 검정 뚜껑의 쇠 몸통의 투박한 저가 전기포트를 팔고, 중고로 세라믹 모자이크 문양의 전기 포트를 샀다. 집에 놀러 오는 친구마다 꼭 한 마디 하게 만드는 전기 포트였다. 그럴 때마다 저렴이로 내 주변을 가득 물건을 땜빵하며 살지 않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인생을 연속적으로 대접하고 있다는 걸 물을 끓일 때마다 느끼고 있다. 


서량의 말마따나 결혼 때 오래오래 두고 쓸 좋은 물건을 산다는데 결혼 계획이 없는 내게 오래 걸리더라도 천천히 꾸리고 싶은 것들로 가득 내 공간을 꾸리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한 번에 혼수품을 들이지 않고 차근차근 비혼품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엄마가 서울에 올라오면서 싸준 이십 년 가까이 된 쇠 수저에서 천천히 하나씩 바꾸기 시작했다. 


나의 첫 비혼품은 반려 식물이었다. 다섯 평짜리 자취방으로 불렸던 방 창문에 보안이라는 명목으로 있던 “인테리어용” 쇠창살 앞에 놓아두었다. 감옥 같은 자취방에서 내 삶의 생명력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꽂아두었다.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집주인의 취향이 가득 배인 나비 문양 벽지에는 좋아하는 엽서와 포스터로 덮어버렸다. 다음은 엄마의 그늘을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우선 엄마가 싸준 일관성 없는 락앤락통들을 친구들에게 반찬을 나눠주며 떠나보냈다. 분리수거장에 버려진 유리병들의 라벨과 접착제들을 손수 벗겨내면서 그 빈자리들을 하나씩 메꿨다. 오래된 수건들을 버렸다. 

택시를 타려다 만 날, 대신 좋은 샐러드 볼 하나, 라탄 테이블 매트 하나, 양초 하나를 사기 시작했다. 새로운 습관들도 생겼다.  마시는 컵 밑에 코스터 하나를 두고, 향초와 인센스를 피우기 시작했다. CD 플레이어에는 내가 좋아하는 보사노바나 클래식 기타 음반을 꽂아서 틀어놓았다. 줄곧 잠옷으로 입어온 학창 시절 체육대회 반티와는 이별하고 나름대로 상·하의를 맞춘 잠옷을 입기 시작했다. 


비싼 것들이 아니더라도 손때 묻은 물건들도 많다. 길에서 주운 고장 난 80년대 스탠드를 수리하고는 스위치를 달았다. 감쪽같이 십만 원이 넘어 보이는 빈티지 스탠드가 되었다. 벗겨져 가는 커다한 1인용 소파를 무료 나눔을 받고 다리에는 바퀴를 달았다. 엄마가 안쓰는 예쁜 패브릭을 들고 와서 덮었다. 버려진 목재를 뚱땅거려서 노트북 받침대를 만들었다. 여행하며 사 모은 예쁜 패턴의 패브릭으로 마무리했다.


잡지에서 봐왔던 아름다운 사진 속 멋들어진 삶은 한순간의 좋은 집, 좋은 물건들로 가득 채워 완성본으로 한 번에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나의 취향 가득 신중히 선택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천천히 쌓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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