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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삐 May 14. 2022

보따리 잔뜩 단 민달팽이

내 삶은 현재진행형 7


친구들 방을 놀러 갈 때마다 내 방 월세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적어도 한 평은 넓어 보였다. 일 년 계약을 끝으로 내 두 번째 공간을 맞을 철저한 대비가 필요했다. 청년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한 민달팽이유니온 협동조합에서 주거상담사 양성과정을 들었다. 

주거 양성가 과정을 토대로 거대한 표를 만들었다. 집 내부 구조는 60점, 집 근처 편의시설과 교통, 집 층수나 소음 같은 것들이 외부 요소로 40점으로 할당해서 총점을 낼 수 있도록 했다. (안타깝게도 그렸던 표는 사라졌다) 예를 들면 부엌은 30점으로 수납장 문이 6개 이상이면 10점, 4개면 8점인 식이었다. 그렇게 2구 하이라이터는 5점, 가스레인지 3구는 5점. 나올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적었다. 


손에 표를 들고 공인중개사 옆에서 하나하나 체크했다. 최고점을 받은 집을 선택할 예정이었다. 은근슬쩍 내 방 물어보니 내 방은 천에 사십오로 내려가 있었다. 부동산 중개비를 아낀 건 할머니뿐이었다. 일주일은 집을 보러 뛰어다닐 수 있을 것 같이 의지가 불타올랐다. 이번 집은 71점.


“학생 정말 꼼꼼하네요. 이십 년 넘게 공인중개사 하면서 그렇게 표 그려오는 학생은 처음이에요”


그 말이 유난이라고 비꼬는 것일지라도 급한 사람이 지는게 부동산이다. 어린 나이를 약점으로 잡혔었으니, 깐깐해라도 보이는게 일종의 전략이었다. 오늘 못 찾으면 내일 또 찾는다. 


  “ 이 매물은 진짜 아껴둔 집인데, 공간도 넓어서 여기는 지금은 둘이서 살아요.”


흠. 보여 준 집 중에서 옵션도 괜찮고, 크기도 컸다. 이전 집들은 내 눈을 낮추기 위한 포섭이었던 건가? 그럴 거면 처음부터 보여주지.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기엔 일렀다. 이제서야 슬슬 공인중개사가 아껴둔 매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절대 이 정도로 마음에 드는 표정 내줄 순 없었다. 속으로 공인중개사의 번드르르한 말에 반박하며 내 손에 든 표를 보며 이전 집들을 복기했다. 절대 당하지 않는다. 


다음 집으로 향할 때마다 공인중개사의 말수는 서서히 줄어갔다. 공인중개사만 3곳을 들렀다. 이번 공인중개사에 와서는 네 집을 돌아보며 두 시간 동안 괴롭히고 있었다. 다음 집으로 향할 때 공인중개사는 짧게 소개를 하고 끝냈다. 


 “이 집은 잘 나오지도 않아요. 여기는 다들 보시면 바로 계약하세요. 오늘 처음 한 분 보셨는데 계약 고민하고 계세요. “


도착하니 술집이 즐비한 거리라 영 소음에 취약한 곳이었다. 외부 점수 22점. 들어간 방에는 책상과 침대가 없었다. 책상이 없는 건 감점 요소였다. 


점수표를 버렸다. 점수표는 의미가 없었다. 좋아하는 표정이 삐져나왔다. 들어가는 게 설레는 곳, 그거면 집을 계약할 충분한 이유 아닌가. 일년 전보다 훨씬 더 준비되어 있었다. 수많은 집과 시세를 봐왔다. 점수표를 그리며 이미 내가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충분히 고민할 수 있었다. 수치는 결국 확신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었다. 


어떻게 가구를 배치할지 벌써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연신 집안을 찍어댔다. 문은 없어도 부엌과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고 화장실에는 창문이 있었다. 체리 색 시트지로 뒤덮인 h형 책상이 들어차 있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게 빌트인 되어 있는 곳보다 수고로운 일들이 필요한 곳이었지만, 그건 온전히 나와 맞는 집을 고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두 번째 공간에 들어가고선 커다란 원룸을 활용하기 위해 내게 필요한 공간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단조로운 집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공간의 구획해야 했다. 긴 직사각형의 공간을 자는 곳과 옷방으로 나누기로 했다. 선반과 옷장을 ㄷ 모양으로 설치하고 러그를 깔자 옷장 공간이 분리되었다. 뻔한 건물에서 테트리스 하며 꾸며놓고 공간을 이해하면서 집을 사랑하게 됐다. 내 물건에 애정이 많았던 만큼 공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도 비싼 가구를 사지 못했다. 대량보급형으로 나온 철제 조립, 혹은 플라스틱으로 된 미니멀한 가구들을 샀다. 내 삶을 임시가 아니라고 대접하려 해도, 집이 비워진 상태에서 차근차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채워 나가려 해도 멈칫거렸다. 


내가 살고 싶은 동네가 아니었으니까. 단지 학교 옆이기 때문에 살 뿐이었고, 졸업하면 비싸디 비싼 대학가 월세를 견딜 이유가 없었기에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어디엔가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없었기에 오래 쓸 수 있는 가구를 들이지 못했다. 


그렇게 월세, 휴학, 교환학생을 이유로 서울에 상경한 오 년 동안 여섯 번의 집을 거쳤다. 나일 수 있는 공간은 너무 쉽게 옮겨져만 갔다.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은 물건들은 늘어나는 데 오래 함께할 수 있는 공간과 동네는 내게 없다. 


언제나 이사를 걱정했다. 돌아갈 곳은 엄마의 집이 아니지만, 전입 신고한 곳은 ‘본가’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대한민국을 국적으로 부산에서 태어나 학창시절 내내 부산에서 자랐지만, 부산이라는 대도시는 갈 때마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달라져 있었다. 


중고등학교 동창들은 이미 흩어져 다른 곳에 살았고, 우리는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너무 달랐다. 서로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자신의 인생을 쌓아가는 동안 서로의 연락 빈도는 줄어만 갔다. 가끔 겨우 시간을 내서 만나면 우리의 대화는 과거 학창 시절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땐 그랬지. 우리의 추억 만이 너무나 달라져 버린 우리를 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대화 주제였다. 


부산이라는 곳에서 엄마의 딸로서 밥을 얻어먹는 거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엄마 집이 있는 도시일 뿐이었다.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해내고 있는 일들과 내 삶과 일을 이해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없었다. 


이제는 돌아갈 곳이 있다는 뜻을 내포한  본가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남은 인생 돌아갈 곳은 엄마의 취향과 세월이 가득한 집이 아니니까. 


이사를 도와준 친구에게 난 달팽이 중에서도 집이 없는 민달팽이 같은 신세라고 한탄했다. 그런 친구는 내게 “어떤 민달팽이가 이렇게 많이 짐을 들고 다녀!”라 이야기했다. 맞다. 보따리를 한껏 짊어지고 무거워 내려놓고 싶은 민달팽이다. 이렇게 많은 짐을 이고 지고 떠돌아다니고 싶지 않다. 살고 있는 집을 한껏 사랑할 때쯤, 동네가 계절에 따라 바뀌고 자주 가는 가게의 사장님과 친해질 때쯤 동네를 떠나는 삶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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