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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삐 May 15. 2022

돌아갈 수 없는 마을

홀로 설 수 있을까 1

* 이 챕터에 인용된 1인 여성 가구 인터뷰는 <여성 1인 가구 혼자 있지만, 연결되어 잇는 - 은평구 여성 1인 가구 설문조사, FGI 결과 분석, (이상희, 2018)>에서 발췌해왔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이 세상에 전해지길 바라며 원 인터뷰를 실었다. 


동네, 지역구라는 말이 더 편하지, 왠지 마을이라는 단어는 대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썩 감기는 표현은 아니다. 전쟁과 근대화를 겪고, 무자비한 지역개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일구어낸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마을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태반일 듯하다. 부산이라는 대도시에서 자라며 초등학교 시절 마을이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친구들, 심지어 서량에게조차도 웃음을 사며 마을이라는 단어에 대한 냉소를 느꼈다.


그럼에도 대도시 어디에선가 연결된 공동체는 있다. 서울이 토박이인 친구의 어머니는 성당에서 한번 자리를 맡고 나더니 동네를 한 번 나갔다 오면 그날 언제 어디를 누구와 돌아다녔는지 말하기도 전에 이미 엄마가 읊고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부산이라는 대도시에도 마을 공동체가 있었다.


수박을 먹고 싶었던 일곱 살, 홀로 썰다가 손을 크게 베였다. 펑펑 울면서 서량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동네방네 내가 다쳤음을 알렸다. 


“할머니, 나 손가락 잘렸어요”


다음 타자는 수업이 끝나면 종종 놀러 갈 만큼 친했던 공부방 선생님이었다. 내가 아는 모든 번호로 전화를 하고 나서야 서량에게 나의 응급상황을 전달 할 수 있었다. 모두가 내 울음에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는 사이에도 동네방네 더 알려야 했는지 그새 못 참고 경비실로 내려갔다. 그렇게 1층 아주머니와 경비 아저씨도 내가 손가락을 다쳤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주머니와 경비원 아저씨 덕분에 응급처치가 다 됐을 때에야 경애와 서량, 선생님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그날 저녁 조그마한 애가 수박이 그렇게 먹고 싶었나보다 와하하 웃으며 4절까지 이어지는 놀림과 함께 마루에서 모두 함께 수박을 나눠 먹었다.  


같은 동 803호(였을 테다)에는 다른 친한 H 언니가 살았다. 여느 때처럼 “언니 놀자”며 모두가 듣는 인터폰으로 연락했다. “비 오는데?”라는 물음에 나는 “비 맞으면서 놀면 되지!”라는 패기 넘치는 말을 전했다. H 언니의 어머니는 “너희 로맨틱하다”라며 인터폰 너머로 말했다. 과연 우리는 영화처럼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다 젖어버린 신발을 벗어젖히고 물장구를 쳤다. 


새로 이사를 하고서, 어디서 본 거는 있어서 이사 왔다며 나름대로 집에 있는 먹을 거를 챙겨 같은 층 집 초인종을 눌렀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가끔은 저녁에 파전을 한 날이면 내가 요리라도 하는지 한 장 더 구워주면 안 되냐고 하며 옆집에 가져다드리곤 했다. 그렇게 서로의 문 앞에서 다른 먹을 것들이 오갔다.


앞집에는 나보다 (기억상으로는) 2살, 5살 어린 동생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새 수업이 끝나면 집에서 TV를 켜지 않고 괜히 과일을 들고 옆집에 놀러 갔다. 옆집에는 나보다 동생들이 살았으므로 나는 그 동생들을 예뻐했고 나름 언니 노릇을 하고 싶어 했다. 한 번은 삶은 달걀을 까주겠다며 조심조심 다 까고 보니 앞집 동생들은 이미 손에 반쯤 베어 문 달걀을 쥐고서 내가 까는 걸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묵묵히 지켜보며 앞에서 하나 더 까고 있는 S 이모와 눈이 마주치고는 머쓱히 깐 달걀을 베어 물었다. 


이사하면서 H 언니도, S 이모와 동생들과도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이제는 얼굴조차 흐릿하다. 그 집을 다시 찾는다고 해도 그들 역시 떠났을 테다. 돌아갈 수 없는 마을만 마음속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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