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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삐 Oct 26. 2020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

#1 요즘 어떻게 지내?

"요즘 어떻게 지내?"


나한테서 그 뻔한 말을 들으니까 긴장되네. 


"왜?"


그 질문을 했던 사람들 중에 정말로 내 일상을 궁금해했던 사람이 있었나 싶어서. 그냥 관습적인 인사들이잖아. 

얕은 대화를 나눈 사람이 복도에서 스치면서 묻는 "What's up?"이나 "How are you dong?"같은 물음을 던지면 나는 "I'm doing well."이나 "Great." 같은 말을 하고 "How about You?" 따위를 예의상 곁들이는 거지 뭐. 


"맞아. 미드에서 'Great'는 앞으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이야.' 정도로 의역해줬으면 좋겠어."

 

한 번은 연락도 잘 안 하는 애가 엄마한테 얕은 우울증인 것 같아서 울면서 전화했더니 너무 걱정된다고 바로 한국 들어와야 하는 건 아니냐고 하더라고. 한국 들어가기 싫어서 우는 건데.


"하하. 맞아. 한국 들어가면 우울증 더 깊어질 거 뻔하지. 하루에 일정 세, 네 개 소화하면서 내 생각 고민도 못해본 채 살아야 하잖아"


한국 카톡 그래서 절대 안보잖아. "거기서 어떻게 지내?"라는 말에 튜토리얼도 만들어놨잖아, 나. 첫 번째는 긍정적으로 시작해야 해. 장애인과 부모들이 대중교통 타기 너무 편하다, 여기 사람들이 너무 느긋하다, 비건 살기 너무 좋다고 감동하고, 학교 등록금도 없다더라 따위. 그래도 너무 자랑하면 부러워하니까 나노 인종차별 경험한 거, 여행지에서 버스 놓친 거나 기차 잘못 탄 거나 물건 잃어버린 거 이야기 정도 하면 30분 훌쩍 가지. 


그렇게 쉽게 일상을 묻는 사람들에게 대학교 4학년을 목전에 두고 외벌이 엄마가 내년에 명예퇴직하신다고 이야기할 순 없잖아. 자격증 하나 없고, 제2외국어 하나 할 줄 모르는 문과생이라는 현실에 대해서 한탄해봤자 뭐해. 서로 위치가 다르면 한 사람은 박탈감 느끼는 거고, 서로 상황이 비슷하면 서로 씁쓸한 현실만 마주하는 건데. 없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고민은 스스로 하면 족한걸.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관해 진실되게 말해본 적이 까마득해.


... 그래서 나 스스로 그걸 인정하고 있는 게 무섭네. 그걸 묻는 사람들의 어떠한 기대와 예상이 있는 걸 뻔히 알잖아. 


"응. 자살 예방 센터 위원회 직원들이 너 점검하는 거잖아. 상황 개선은 못해줘도 죽지는 않게 전 세계에서 사복 요원 투입했어. 시리한테 '자살'이라는 말만 해도 알걸?"

시리야~ 자살


자살 예방 센터. 오, 거의 비슷했어.


어쨌든 상대의 예상을 벗어나는 대답을 했을 때 이어지게 되는 깊은 대화, 그 뒤에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 


"넌 대화가 끝난 후에 뭘 얻고 싶은 건데?"


... 상대에게 무언갈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 깊은 대화 뒤에 예상되는 관계가 벅차더라고. 지금은 그걸 피하고 싶은 것 같아. 


깊고 좁은 관계, 얕고 넓은 관계. 그 구덩이가 단단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나 나는 그 관계를 모래사장에서 파고 있는 기분이다. 다음 날이면 파도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걸 아는데도 끊임없이 구덩이를 파는 기분이다. 

우리는 모두 시지푸스의 벌을 받고있는 게 아닐까. 언제나 그 커다란 파도 앞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관계라는 구멍을 파야만하는 벌을 받고있다고 말이다. 어떻게 구멍을 파든, 바닥에 나뭇가지로 유치하게 우리의 상황을 확인하면서 "우리 이대로 영원히"라고 쓰든. 시간이라는 파도는 우리의 노력을 끊임없이 지워낸다.  

관계에 집착할 수록 벌이 고통스러워진다. 마치 원죄처럼 끊임없이 고통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조금은 나아진다.


깊은 대화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하더라고. 그 착각의 대가로 상대와 내가 끊임없이 다르구나를 깨닫는 시간들은 괴롭고. 우리는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다가 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뿐인데. 결국 자신의 길을 향해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멀어진 걸 발견할 텐데 말이야. 


만남과 이별이 명확했던 학창 시절에는 이별에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매번 최선을 다해 인연을 붙들고 있었게 아닐까 싶어. 이제는 작별 없는 멀어짐이 작별을 남길 수 있는 이별보다 훨씬 더 많아졌으니까, 그 방법을 고수할 수는 없잖아. 그 방법을 붙들다 상처를 받을 만큼 받았으니 나도 지켜야겠더라고.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랑 다른 사람을 이해를 하기 위해 대화하면서 나랑 같다고 착각 안 하려고 끊임없이 거리를 두게 되는 것 같아. 


".... 그래, 인생은 결국 혼자지. "


근데 인간이란 어리석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결국에는 이 사람은 나와 같은 거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이 생기고 또 그렇게 착각을 하지.


... 그렇게 또 몇 번의 상처를 받으면 나는 착각을 멈추게 될까?


"그 착각을 멈추게 되면 나는 어떤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까? .... 그런 관계가 괜찮을까?"


다르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몇 명만은 나와 비슷하다며 평생을 약간의 착각 아래 살지도 모르겠다.


... 내가 핀란드에서 느낀 외로움이나, 내가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이유를 알겠어. 나는 여전히 아팠어. 나는 여전히 다른 길을 걷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었던 것 같아. 


그래도 적어도 서로가 다른 길을 걸어갈 때, 그때를 잘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다음에는 조금 더 잘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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