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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은 Jan 05. 2024

아파트 한 바퀴

지금 만나러 갑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덮였다가, 빠르게 덮인 만큼 빠르게 녹아 사라지고 있습니다.

눈 덕분에 며칠 주춤했던 아파트 산책을 아이와 함께 나가 봅니다.


먼저 아파트 오솔길로 접어들자마자 잎은 모두 떨구고 쪼그라든 빨간 열매만 매달고 서있는 산수유나무가 보입니다. 키가 유독 작아서 봄, 여름, 가을. 꽃 피고 열매 맺는 내내 아파트 아이들 소꿉놀이의 단골 재료가 되어주었던 고마운 산수유나무에게 인사를 건네봅니다.

'애썼어. 내년에도 아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산수유나무가 될 테니 이 겨울 푹 쉬길!'


저벅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걸음이 멈춰 섭니다.

겨울나기 하느라 누렇게 색이 들뜬 잔디와 풀들 사이에 유독 민둥민둥한 경사로가 보입니다. 

날씨 따뜻한 계절엔 아이들 오가는 지름길 노릇을 하느라 잔디가 자랄 틈이 없고 추운 겨울 눈이 내리면 손마다 들고 나온 썰매를 태워주는 썰매길이 되느라 사계절 민둥한 경사로. 그에게도 인사를 건네봅니다.

'일 년 내내 반짝이는 네 수고에 감사해.'


경사로를 내려서니 바로 아래 딱딱하게 얼어붙은 겨울땅이 보입니다.

여름 비 온 다음날이면 아이와 함께 달려가 부지런히 지렁이 똥탑을 찾던 똥탑 황금밭.

축축한 물기를 머금고 몽글몽글 쌓여있는 똥탑 주위 작은 구멍을 찾은 뒤에 그 주위를 파면 숨어있는 지렁이를 만날 수 있지요. 흙을 먹고사는 지렁이가 흙속의 유기물만 먹고 나머지는 다시 몸 밖으로 내보내어 쌓이는 똥탑. 그러니까 "똥은 똥이지만 지저분하지 않다"는 아이말이 귓가를 맴돕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을 지렁이들에게도 인사를 전해봅니다.

'안녕, 여름에 또 만나.'


놀이터를 가로질러 조경용 큰 바위 옆을 지나갑니다. 크고 단단한 바위에서 반짝이는 석영을 찾느라 돋보기를 들이댔던 아이는 이전에 찾아냈던 석영조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 저 바위에서 석영만 분리해서 유리를 만들고 싶어요." 하고 말하는 아이의 재잘거림이 바위에 부딪힙니다. 순간 바위가 움찔했다고 느낀 건 제 착각이겠죠.

바위에게도 미안함을 담은 마음을 전해 봅니다.

'진짜 네 몸에서 석영을 분리하진 않을 거야. 반짝이는 네 몸이 진짜 멋지다는 칭찬으로 들어주면 좋겠어.'


걷고 멈추고, 걷다가 또 멈추고.

빨간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가로등 아래에서, 정자 처마 밑에서, 굵은 나무 밑동 앞에서.

지나는 곳곳마다 피어나는 에피소드에 걸음이 한없이 늘어집니다. 일일이 인사를 전하고 잘들 있는지 안부를 확인하고 아이와 '그때 그랬지!' 하며 정서를 나누고 유대를 확인하는 시간.

아파트 한 바퀴를 돌면 마음이 노곤노곤하게 풀어지는 아이의 성장과정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파트 한 바퀴. 

오늘도 우리는 아이의 과거와 현재를 만나러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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