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은 무슨 색일까. 색을 알려면, 빛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보는 물체의 색은 사실 빛의 색이다. 노란 바나나는 빛을 이루는 연속적인 색 스펙트럼 중 노란 파장 빛만을 뱉어낸다. 반사된 빛이 눈에 도달하면 우리는 바나나를 노란색으로 인식한다. 흰색은 모든 색깔 파장의 빛이 난반사되어 섞인 결과다. 하지만 모든 색깔 빛이 섞이지 않고, 각각의 색을 그대로 반사한다면? 그게 바로 거울이다. 거울은 실물 세계에서 뿜어내는 모든 빛을 반사하지만, 그 빛은 섞이지 않아 흰색으로 보이지 않고, 실물 세계 그대로를 보여준다.
하지만 사람들은 입사하는 빛을 100% 반사하는 물질을 찾아내지 못했다. 따라서 세상에 있는 모든 거울은 불완전하다. 모든 빛을 입사한 각도 그대로 되돌려 주는 듯 보여도, 실제로는 빛을 조금씩 흡수한다. 거울 두 개를 맞대어 비추면 상이 무한히 이어질 것 같지만, 이 무한수열은 수렴값이 존재한다. 표면에서 튕겨내는 빛 중 일부가 흡수되기 때문이다. 이때 거울이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정도는 파장마다 조금씩 다르다. 현대의 거울은 석영 유리로 만들어지는데, 석영유리는 다른 색보다 녹색 파장 빛을 조금 더 반사한다. 그래서 거울에 비친 거울은 무한히 어두워지며 녹색에 가까워진다. 다른 색 빛보다 노란 파장 빛을 반사하는 바나나를 보고 우리는 노란색이라 부르니, 거울의 색 또한 녹색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바나나는 과연 노란색일까? 우리가 보는 바나나의 색깔은 노란빛을 반사한 결과다. 그림자 속에 들어간 바나나는 노란빛을 띠지 않는다. 생기를 잃어 누르스름한 잿빛이 된다. 햇빛이 도달하지 않는 깊은 바다는 바나나에게 노란색을 허락하지 않는다. 햇빛 아래 바나나를 냅둔다 한들 영원히 노란색이 아니다. 처음엔 새파란 초록빛이다. 조금씩 샛노랑이 되더니 어른노랑으로 익는다. 시간이 더 지나면 갈색으로 뭉글해지고 종단엔 모든 빛을 흡수하곤 검은색이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나나를 노란색이라고 부른다. 그림자 속 바나나도, 깊은 바닷속 바나나도, 아직 덜 익은 바나나도, 결국 썩어버린 바나나도 노란색이 없지만 노란색이다. 색은 실재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우리는 노란 파장이 포함된 빛을 받은 바나나의 특정 시기만을 선명히 기억하고 그 색깔을 전부로 고정한다. 마치 우리가 특정 환경 속 모습만으로 사람을 정의하려 드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과 특정 맥락에서 잠시 시간을 공유한다. 처음 누군가를 만나면 조심스레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탐색한다. 상대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기에 가장 공적이고 통상적인 말을 건넨다. 돌아오는 답변의 내용뿐 아니라 적절성, 뉘앙스, 목소리의 크기, 말투, 표정 등을 조합하며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빚어낸다. 만남을 지속하며 그 사람의 고유한 성질과 사람됨을 알아간다. -고 생각한다. 점점 상대가 예측 가능해지면 그 사람을 알았다며 몇 개의 단어와 몇 마디 문장으로 정의한다. 이 사람은 다정한 사람이야. 이 사람은 혼자 있기를 좋아해. 이 사람은 수줍음이 많아. 하지만 이는 ‘나와의 역동 안에 있는’ ‘현재’ 그 사람이지, 그 사람의 본질과 진실이 아니다. 바나나의 고유함은 노란빛을 반사하는 성질에 있지, 노란색에 있지 않다.
나는 과연 무슨 색일까. 이 질문은 마땅치 않다. 어떤 빛을 받는지에 따라 나는 다른 색을 띤다. 나다움은 색깔에 있지 않고 유독 반사해 내는 빛에 있다. 취미 모임에서 드러나는 나와 직장에서 드러나는 나는 다르다. 집에서 동생을 대하는 나와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는 나는 다르다. 밖에서 나는 자주 웃지만, 집에서 난 잘 웃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나를 어려워할 때 나는 상대에게 더욱 친절하고 관계에 힘을 준다. 이 성질은 사람마다 다를 터이다. 그러니 나의 본성은 장면마다 보이는 나의 단편보다는 앞서 언급한 성질에 있을 것이다. 상대에 따라 색이 변하는 내 모습까지 전부 나의 본성이다. 이 중 진실된 나는 고정되어있지 않다. 그마저도 ‘지금’ 나의 나다움일 뿐이지만 나다움을 발견하는 건 기쁜 일이다.
나의 나다움은 상대의 상대다움을 온전히 보지 못하게 한다. 각자의 나다움은 서로에게 빛이다. 고유한 파장만을 뿜어내어 상대가 뿜어내려는 색깔은 그대로 반사되지 못한다. 나는 그 빛만을 보고 고정된 이미지를 빚어 상대를 인식하기에, 내가 보는 상대와 오롯이 존재하는 상대의 본성은 다르다. 개개인의 이미지는 또 다른 개개인의 정체성을 걸쳐 변성된다. 나뿐 아니라 상대 또한 같은 작용을 하니 서로가 감안해야 할 일이다.
거울은 무슨 색일까. 거울은 가장 편견 없는 색이다. 거울은 모든 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