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평화다
밥이 답이다
밥부터 나누세
해병대전우회 건물에 현수막이 크게 걸려선 밥을 외친다. 알고 보니 밥퍼나눔운동본부에서 내건 현수막이었다. 노숙인, 독거노인, 무의탁 노인께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듯했다. ‘점심 제공’, ‘식사 제공’ 대신 ‘밥’ ‘퍼’ ‘나눔’ 글자에는 따스한 우악스러움과 인간다운 정겨움이 전부 담겨있다. 밥퍼나눔본부는 해병대전우회와 건물을 공유했다. 난 또 해병대전우회에서 다 끝난 전쟁 뒤에 밥 한상을 나누는 전우애를 내건 줄 알았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고슬고슬한 밥이야말로 겨울 저녁에 제격인 기본기지 싶다. 뭐든 좋으니 뜨끈한 국물도 함께 해야 한다. 영하 5도든 영하 10도든, 겨울 5도는 와닿지 않고 모두 춥기만 하다. 나뭇가지 빈틈을 통과해 불어오는 바람은 냉기와 함께 텅 빈 날카로움을 나른다. 뼛속 깊은 곳까지 전달되는 것은 냉기뿐 아니라 외로움이다. 겨울 외로움은 피부만 데운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피부 저 깊숙한 데까지 데워 안에서 밖으로 온기를 뿜어야 한다. 생각이 이쯤 미치는 저녁이면, 갓 지은 밥에 뜨끈한 국물을 몸 깊숙이 들이밀어 뱃가죽 아래 있는 깊숙한 위장부터 데우고 싶어 진다.
어느 날은 저녁 8시 반이 되도록 밥을 먹지 못했다. 8시 반이라니. 호들갑을 떨 만큼 늦은 건 아닐지 몰라도 그날은 저녁 약속의 날이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먹고 놀자며 만난 자리의 저녁밥이 8시 반이기엔 너무 늦다. 원래 가려던 식당의 자리가 나길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결국 라스트 오더 시간까지 미뤄진 게 이유였다. 대학 시절 자주 찾던 파스타 집을 가려했다. 면과 함께 추억을 삼키려 기다림을 고집했지만 결국 마지막 주문 시간을 넘겼다.
겨울의 8시 반은 뒤숭숭했다. 온 공기에 서린 냉기가 바깥으로 노출된 피부를 찔렀다. 앙상한 바람이 윙윙댄다. 우리는 배곯으며 무엇을 먹을지 발만 동동댔다. 밥 밥 밥. 밥을 먹고 싶었다. 뜨끈한 국물로 위장을 적시고 채우고 싶었다. 대부분의 밥집이 닫아, 술 안 마시는 셋이 밥을 찾아 술집에 들어갔다. 불고기 전골. 그래 전골을 먹자. 뜨끈한 국물로 온 육신을 데피자. 저녁 기대로 점심도 걸러 잔뜩 곯은 배를 달랜다. 곧 밥이 나온다.
전골냄비에 팽이버섯, 새송이버섯, 표고버섯과 당면, 두부, 대파, 당근이 양념 밴 불고기를 넘칠 듯 둘러쌌다. 불고기에 밴 간장 양념이 육수로 스며든다. 가스버너 작은 불에 손을 갖다 대어 한기를 녹인다. 뜨끈한 김을 타고 달큰한 전골 냄새가 퍼진다. 육수는 간장이 스며들어 진해진다. 뿌리가 뭉친 팽이버섯은 다 익기 전에 풀어줘야 잘 뜯어진다. 젓가락으로 팽이버섯들을 풀어주고 고기의 붉은기가 사라지길 기다린다.
공깃밥은 의외로 따뜻하지 않았다. 뚜껑 있는 스텐그릇 대신 가정용 밥그릇에 동그라니 담겨 열기는 금세 날아갔다. 고기가 익기 전 먼저 익은 새송이 버섯을 밥 한 숟가락에 올려 먹는다. 달콤하고 짭조름한 맛의 서문이 열린다. 국물이 아직 재료에 깊이 배지 않아 맛 또한 미지근했지만, 깊이 우러날 맛은 충분히 예상됐다. 국물이 진하게 졸여지는 동안 밥 대신 이야기를 입으로 먹었다. 성격 드센 직당상사의 뒷담, 누군가의 바람과 이별담이 식탁을 오갔다. 제각각 내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이 입에서 가로새고 귀에서 가로막힌다. 조미료다운 얘기다. 조미료는 배를 채울 수 없다.
드디어 고기가 익었다. 국물은 팔팔 끓는다. 갈색 고기와 두부, 버섯, 국물 들을 한 국자 가득 떠서 서로의 빈 그릇에 채운다. 세 그릇에 다 채워 넣곤 그제야 잘 먹겠습니다. 따끈하고 달짝진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식도와 위장까지 데피고 배에 도달하여 허기를 채운다. 야들야들하게 익은 고기의 담백한 기름맛과 감칠맛을 씹는다. 살 것 같네. 뭘 먹어도 맛있네. 두어 마디 나누곤 조용하다. 식기들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음식물을 목 넘기는 소리만 잠시 난다. 뒷담과 가십은 잔뜩 끓는 국물에 녹아 사라졌다.
국물에서 온 온기가 피를 흐른다. 안주로 만들어져 더욱 짭쪼름하고 맛이 진하다. 국물에 밥 한 숟가락을 담갔다가 대파와 버섯과 두부를 올리고 삼킨다. 9시가 다 되어서야 저녁 한 끼를 나눈다. 한식 주점 구석, 조도 낮은 노란빛 조명 아래에서 불고기 버섯전골을 나눈다. 음식을 나누지만 먹기 행위는 혼자 한다. 모여 앉아 팔팔 끓는 전골냄비를 앞에 두고 한 국자씩 떠가며 각자의 양을 소화한다. 뒷담과 가십 대신, 가지 못했던 파스타 집에서 협재볶음밥 먹던 때와 강의실에 같이 공부하자 모여 피자 시켜 먹던 때와 스터디룸을 빌려놓곤 카트라이더를 했던 때가 오간다. 이야기는 새지 않고 냄비전골에 모여 각자 그릇에 떠진다. 구석진 곳에 구석지게 난 창 밖으로 눈이 내린다. 조용하고 고요하게 내린다. 눈은 창 밖이고, 내 눈은 밥 앞이다. 따뜻함이 옹기종기하다. 밥이 평화다. 밥이 답이다. 밥부터 나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