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첫 문장으로 글 쓰기
*유명한 첫 문장으로 글쓰기*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동녘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 조정래, 《태백산맥》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동녘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있었다. 나는 완전히 낯선 숙소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밤공기는 오래된 슬픔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이곳에 오게 된 건 충동이었다. 10월 중순에 다다르자 밤공기는 눈에 띄게 스산해졌다. 초록빛 이파리들이 물기를 잃어 말라가고 있었다. 익숙했던 길목은 을씨년스럽게 탁해졌다. 한 달 전과 달리 색을 잃은 듯 보였다.
무엇이든 잃어가는 가을 프레임에서 나는 꼭 이방인 같았다. 어디에도 속해 있지 못하고, 마치 영화를 보듯 내 오랜 터전을 멀찌감치 지켜봤다.
푸른색. 푸른빛을 보고 싶어. 나를 모두 품어줄 깊은 푸른빛.
푸른색은 생명의 빛이니까. 드넓은 바다라면 날 모두 품어줄 것 같았다. 무작정 동해행 기차에 올랐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기차는 한산했다. A열을 예매하면 기차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더니 정말 그랬다. 잠깐 졸다 깼더니 창밖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해가 반사되어 물결 위 잔빛이 일렁였다. 소나무 몇 그루가 지나가며 시야를 가리는 것을 빼고는 온통 바다였다. 푸른색. 푸른빛. 푸른 하늘. 푸른 바다.
거기까지였다. 기차 창틀을 아득히 넘는 끝없는 바다가 날 푸르게 맞이했지만, 어쩐지 배경과 ‘나’가 분리되는 경험을 한번 더 했을 뿐이었다.
일찌감치 숙소에 들어왔다. 숙소는 깔끔했다. 생활 냄새 하나 없이 건조했다. 바다를 보고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허기로 느꼈다. 영화에선 이럴 때 혼자 술을 마시던데... 밖에서 크림빵과 맥주 두 캔을 사 왔다.
다시 들어온 숙소는 적막했다. 시계 째깍이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맥주 한 캔을 따서 남은 맥주캔에 혼자 건배를 했다. 스스로가 제법 처량하게 느껴졌다.
택이 생각이 났다. 작년 이맘때 우린 가을 바다가 제일이라며 속초에 놀러 갔었다. 근처 상점에서 산 불꽃 막대에 불을 붙이고는 터지는 불꽃으로 서로의 이름을 휘적이며 그렸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손 끝의 작은 불꽃이 타들어가길 아쉬워했었지. 우리의 사랑도 그 해 함께 사그라져버렸다.
철썩이는 파도소리. 째깍이는 소리 사이로 파도 소리가 들린다. 사그라진 불꽃 사이로 들린 바로 그 소리였다. 퍼석한 크림빵을 오물거리다 삼키고 커튼을 열어재꼈다.
분명 푸른빛이 드넓었는데, 푸른빛은 어디 가고. 칠흑. 칠흑이 모래사장을 뒤덮었다.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동녘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있었다. 나는 완전히 낯선 숙소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밤공기는 오래된 슬픔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흰 거품이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게 부서졌다. 인적 하나 없는 풍경엔 파도 소리만 퍼졌다. 애잔하면서도 편안했다. 보이지 않는 바다는 모태의 바다였다. 끝없이 넓고, 모든 걸 받아주는 그런 깊은 품의 바다.
눈을 감았다 떠보지만, 상점가 불빛을 받은 모래사장 말고는 짙게 어두웠다. 감는 것과 뜬 것이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제각기의 공간에서 섬처럼 존재할 것만 같았다. 세상 모든 존재가 작게 느껴졌고, 내 작음쯤이야 아무렇지 않아 졌다.
그래, 나를 품어주는 세상은 여기 있구나. 갑자기 목울대가 울컥했다. 오랜 터전에서마저 이방인이었던 난, 순식간에 칠흑에 동화되어 그 속에 안착했다. 택아, 너가 없는 낯선 바다에 난 혼자 왔다. 찬란한 어둠이 날 보듬어준다.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는 숨죽인 밤에. 나는 구원받았다.
막대 불꽃을 하자. 이번엔 내 이름을 적는 거야. 묵빛 밤에 번지는 그믐달 빛처럼 내 이름을 이 칠흑에 꼭꼭 남기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