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의 프롤로그

3부. 사랑과 상실 (4)

by 글희

다시 규칙적인 생활에 날 의탁했다. 퇴근하고 흠뻑 땀을 흘려내면, 몸뿐 아니라 마음의 찌꺼기까지 빠져나가는 듯했다. 개운해진 속에 건강하고 신선한 음식을 채워 넣으면 제대로 살고 있다는 성취감도 함께 차올랐다.

규칙적인 일상은 소란한 마음을 감췄다. 버려진 마음을 덮고 그 위에 삶을 차곡차곡 쌓았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웠으며, 평범했다.

그러나 한켠에는 이 일상을 놓치면 난 다시 무너지고 말 거라는 불안이 숨어있었다. 그래서 난 날 지탱하는 일상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누린 안정은 껍데기 안정이다. 한 꺼풀 벗겨내면 텅 빈 구멍밖에 없는 유약한 지지대였다.

연기도 오래 하면 생활이 되는 게 아닐까 하며 하루하루를 넘겼다... 고 쓰다가 문장을 고친다. 그조차 거짓이다. 난 내 생활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내 속에 자리 잡은 깊은 슬픔을, 어쩔 방도가 없었기에 난 그걸 보지 않기로 택했다.

달리기

제법 쌀쌀해진 어느 날, 뛰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쩌면 잘 감춰두었던 공허를 떨쳐내고 싶어서였을지 모르겠다. 3km쯤 뛰었을 때인가, 느닷없이 넘어졌다. 그동안 폭식으로 불어난 몸뚱이를 발목이 견디지 못했나 보다. 뛰겠다는 호기는 발목과 함께 꺾였다.

상황은 제법 난감했다. 지갑은 출발지 직장에 있었다. 한참 뛰면 더울 걸 고려해 반바지로 갈아입고 뛰던 중이었다. 무릎은 날 것 그대로 노출되어 아스팔트에 진창 쓸려버렸다.

피가 꽤 많이 흘렀다. 핏방울은 흰 양말을 빨갛게 적셨다.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결국 내가 왔던 길로 돌아가야만 해서, 피를 닦지도 않고 뛰다 걷다 하며 돌아왔었다.

한숨만 나왔다. 모두 퇴근해 버린 후라 도움 요청하기 어려웠다. 피 때문에 원래 복장으로 갈아입기도 곤란했고, 그대로 나가자니 점점 추웠다. 참 안 풀린다. 오랜만에 뛰려니 무거워진 몸뚱아리가 날 넘어뜨린다. 택시나 잡고 집에 가야겠다 생각하던 찰나, 당직실이 떠올랐다. 혹시 사람이 있을까.

불이 켜져 있었다.

치료

당직실엔 다행히 사람이 있었다. 선생님께선 상처를 보더니 깜짝 놀라셨다. 어쩌다 다쳤냐며 응급키트를 뒤적이셨다. 응급키트만 받는다면 혼자 약 바르고 나가려 했는데, 선생님께서 애써 나서주셨다. 소독도 해주시고 연고도 발라주시며, 쓱 내 표정도 살피신다. 따갑겠다며 후후 불어주시고 밴드도 꼼꼼히 붙여주셨다.

울컥했다. 누군가 날 돌봐주기도 하는구나. 아파도 항상 혼자 아팠는데 꼭 혼자 애쓰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래 내 상처를 꼭 내가 치료할 필요는 없었다. 당연한 사실이 나에게 깊은 바다를 이고 다가왔다. 나의 애씀과 외로움이 파도처럼 몰아닥쳤다. 내가 참 안쓰러웠다. 모두 혼자 짊어지려 했던 그간의 애씀이, 버티고 서있던 날들이 애처로웠다. 치료가 너무 따뜻해서 속으로 울었다.

나는 삼키는데 익숙해서, 울음도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감사인사를 전했다. 정말 감사하다고. 그 농도는 어느 ‘감사합니다’ 보다도 진했다. 상처를 치료해 줘서 감사합니다. 온기를 전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 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어서 감사합니다. 나도 유약해도 됨을 알려주어서 감사합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엉엉 울었다.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나는 마음껏 나약했다. 나는 앞으로 마음껏 약하고, 마음껏 기댈 거라고, 어리둥절한 동생을 붙잡고 울었다. 닦지 않고 울었다.

회복의 프롤로그

마음껏 나약할 거랬지만 어떻게 하면 나약을 드러내는 것일까. 나는 금방 원래의 규칙적인 생활에 안착했다. 평범한 일상은 중독적이다. 거대하게 들이닥친 애처로움은 금세 없었던 것처럼 가라앉았고, 내 다짐은 점차 미약해졌다.

다시 일상이 파형 없이 잠잠해지며, 나는 권태의 늪에 종종 빠졌다. 그동안 흘리지 않고 참아낸 눈물은 하루하루 쌓여 바다가 되었다. 바다는 소란한 마음을 감춰줬다. 바다를 품고서 하루하루 사는 게 어른인 줄 알았다. 권태는 끈덕지게 나를 끌어내리더니, 거대한 외로움에 나를 침잠시켰다. 내 눈물이 만든 바다. 깊은 슬픔.

낮에 옹기종기 살다가도 밤엔 모두 각자의 꿈에 섬처럼 살잖아. 나는 밤에 혼자 깨어 돌아다니듯 낮을 살았다. 외로웠다. 꿈에 사는 사람들을 깨워내 내 옆에 붙들고 싶었다. 그렇게 그 옆에서 잠들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질 못했구나.

밴드 붙인 무릎을 끌고 엉엉 울며 돌아가던 때가 문득 생각났다. 분명 나는 내 나약함을 공유할 거랬는데, 또다시 나는 나에게 모든 짐을 이게 했구나. 탄탄하게 조각한 일상으로 내 외로움을 또다시 가렸구나.

누군가 나에게 찾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 나서겠어.

그것이 꼭 연인이 아니어도 괜찮다. 혼자와 혼자들이 기댈 수 있는 곳에. 서로가 서로의 받침목이 될 수 있는 곳에 나를 데려가겠다. 그게 나를 일으키는 회복의 프롤로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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