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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미 Dec 01. 2020

사랑의 무게


죽음이 나쁘거나 두려운 것은 아닌데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슬프다.

그래서 가장 슬픈 헤어짐은 바로 죽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남편과 나는 삐삐를  보내고, 우리가 그 녀석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

남편은 아마도 자기가 나보다 더 삐삐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사랑의 무게를  달아볼 수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아마 각자 마음의 무게만큼 사랑했을 것이다.


제이피와 이별했을 때 내 나이 50대 초반이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마나 슬펐는지 이제는 생생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삐삐를 보낸 요즘과 환경이 많이 달라진 건 분명하다.

나는 나이도 많이 들었고, 두 딸이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났다.

대신 남편이 은퇴를 해서 회사를 정리하고 두 사람만 남았으며 그 바람에 일상의 폭은 아주 좁아지고 단순해졌다.

그래서 사람의 머릿속 생각을 '뇌구조 그림'으로 그린다면 나는 어떨까? 생각하기도 한다.


이번에 집에 들른 작은 딸이 제이피를 보냈을 때와 삐삐를 보냈을 때를 비교하며 “엄마는 누굴 더 사랑했어?”라고 물어보는데  그 역시 사랑의 무게를 달아볼 수 없는 일이라 아무 말하지 못했다.

나는 최근에 삐삐를 보내면서  비로소 제이피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당장 삐삐 생각을 하면 가슴이 사무치도록 그립다는 마음밖에 없어서 그런  질문은 말문을 막히게 했다.

딸은 내가 괜찮아 보였는지 “같이 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엄마는 제이피를 훨씬 더 사랑했던 것 같았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삐삐에게도 제이피에게도 미안한 노릇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기억은  흐려지게 마련일까?

비록 기억은 흐려지나 습관은 오래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가령 뒤 베란다에  삐삐 배변 판이 있었다.

삐삐는 그곳에서 곧잘 볼 일을 보지만 심통이 나면 거기에 놔둔 슬리퍼에 오줌을 쌌는데 그것도 모른 채 신발을 신다가 발이 젖기 일쑤였다.

그래서 늘 슬리퍼를 세워 두었는데 나는 지금도 여전히 신발을 세워둔다.

남편의 습관은 어떤가?

어릴 때 청개구리가  비 오는 날이면 왜  개굴개굴 울어대는지? 우화에서 이야기한다.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는 아들 청개구리는 부모가 시키면 뭐든지 거꾸로 하는 성질이라 그를 걱정한 어머니는 죽으면서 자신을 개울가에 묻어 달라고 반대로 이야기를 한다.

아들 청개구리는 어머니가 죽은 후 그 말대로 개울가에 묻고 비 오는 날이면 무덤이 떠내려 갈까 봐 운다는 이야기인데 남편이 청개구리가 되었다.

남편은 삐삐가 베란다에 나가 있을 때 집 안에 먼지가 들어온다고 문을 열어 놓는 것을 질색했다.

그래서 문을 열어두지 않고  늘 닫아 두었다.

그곳에 나가고 들어 올 때마다 일일이 열고 닫으려니 손이 많이 갔다.

삐삐가 그즈음 몸이 불편했던 건 아니었는지?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비로소 남편에게 이야기하는데,

몇 개월 전부터 삐삐는 베란다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뿐 아니라  수십 번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빨리 문을 열지 않으면 발로 유리문을 툭 툭 치며 짜증 섞인 명령을 했다.



그래서 문을 열어두면 그걸 보고 남편이 먼지 타령을 했는데 삐삐가 떠나자 오히려 남편은 늘 조금씩 문을 열어 놓는다.

아들 청개구리처럼..

혼잣말로 삐삐에게 하듯 이야기를 하며 혹시 삐삐가 들어오지 못하면 어쩌냐고 하면서 문을 열어 놓는다.

내가 삐삐가 보고 싶다고 중얼거리면 남편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한다.

그는 삐삐가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믿으며 다만 우리가 삐삐를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영화에서 본 것처럼 삐삐는 문을 닫아도 통과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이라고 믿게 되었는데 가끔 삐삐가 유리창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문소리가 나면  삐삐가 거기에 서 있을 것 만 같다.

삐삐가 떠나기 전날 밤 보았던 하늘의 구름은 영락없는 삐삐의 모습으로 사진 속에, 또 내 마음속에도  생생하게  들어 있다.

구름처럼 하얗고 몽실몽실한  삐삐가 날아가고 있었고 난 그의 뒷모습을 홀린 듯 따라갔는데  영 영 잡히지 않는 먼 곳으로  날아갔다.

그때 우리는  좋은 징조라고  여겼고 실제 다시 품에 안게 될 줄 알았는데..

비록 구름이 흩어져 사라졌지만 사진을 찍어서 남겨 둔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  

그런 이유로 여전히 나는 그 길을 걸으면서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삐삐의 형상을 찾기도 하고 다시 한번 만이라도  삐삐를 닮은 구름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의 무게는 각자의 마음으로 달아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랑의 무게와  달리 시간의 길이는  남편과 나와  차이가 있다.

남편은 삐삐 떠난 날부터 지금껏 날짜를 세고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산책길에서, “벌써  삐삐 떠난 지가 백일이  넘었는데?” 하며 아쉬워했지만 나는 삐삐 없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길고 지루하다.

4개월이 꿈처럼 흘렀으나 아름다운 꿈이 아니라 캄캄한 어둠 속을 지나온 지루하고 막연한 날 들이었다.

이렇게 시간의 길이도 사람마다 다른 것일까?

나는 가끔 어리석은 비교로 시간의 길이를 대어 보기도 하는데 삐삐와 살았던 10년이 결코 짧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사람과 산 10년과 결코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오롯이 붙어서 함께 지내고 집안 어디에나  존재하며  차지했기 때문이다.


자식이 어릴 때는 온종일  함께 지내지만 5세 정도가 되면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유치원, 학교, 학원 등을 다니면서 아침에 나가고 집에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며 따로 자기도 한다.

일상적으로 밥 먹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다곤 하지만 종일 함께 지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삐삐와 지낸 그 시간이 결코  짧거나 모자라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요즘  글을 쓰다 보니 삐삐를 생각하고 마주 대할 때가 많다. 매 순간마다 눈물이 나고 슬프지만 그래도 좋다.

덕분에  더 많이 제이피와 삐삐를 추억하고 오롯이 생각하며 함께 있는 이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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