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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시퀸 이지 Mar 24. 2020

당최 운동이 뭐 길래

- 나만의 운동 개념으로 '근자감' 아닌 '운자감'! -

머릿속 뇌를 굴리면 신체기관도 활발히 운동해 칼로리가 소모된다. 몸과 뇌는 같이 움직인다. 운동이란 피부부터 장기까지 모든 움직임을 아우른다. 사랑을 하면 심장이 마구 뛰는 것까지도. 운동은 근육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떨림을 인지할 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운동만이 살 길이라고들 하나보다. 상대의 떨림도 나를 살리는 길이다. 상대가 ‘시름시름’ 하면 내게 ‘싫음 싫음’ 소리를 안겨 준다. 

어릴 적 어른들 입맛 맞춘답시고 뽑아댄 가락 하나가 있다.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노래다. 노래 맛 살리려고 꺾어 부른 것이지, 지금 내 나이가 한풀 꺾인 정도는 아니다. 가사도 시적이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로 시작하는 가사. 이게 어디 사랑뿐이겠는가. 내 몸을 사랑한 나머지 싹틔운 운동에도 딱 들어맞는 가사다.     


운동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근육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처절한 운동은 눈물의 씨앗일수도 있겠다. 노래 후렴구마냥 사람들 입에 구전동화처럼 오르내리는 말이 있다. "운동해야 되는데."이다. 길 가다 오랜만에 마주치면 날 보는 첫 마디는 “잘 지내?”를 의역한 "운동해야 되는데"이다. 생긴 게 교관 같은가, 숙제 검사라도 하게 생긴 건지 자진납세 멘트를 날린다.    


도대체 운동이 뭐 길래. “운동해야 되는데”를 합창하는 걸 보니 각자 쥐고 있는 운동 개념이 다른 듯하다. 노래 가사처럼 구구절절 거창하게 생각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로 움직이는 거라고, 욕 나올 정도로 근육 만드는 거라 생각한 걸까. 내가 생각하는 운동은 근육 움직임의 모든 것이다. 헬스장까지 가서 기구를 들어 올리거나, 매트 펼쳐 놓고 자세를 취하거나, 그도 아니면 운동화 신고 산책로를 걸어야만 운동은 아니라는 소리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무조건반사처럼 군기 잡는 자세가 있다.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지옥철에서는 배와 다리에 힘을 준다. 콩나물시루에 휩쓸리지 않는 효과도 있지만 하체운동 시간이기도 하다. 전철에서 내려서는 요염한 에스컬레이터보단 우직한 계단에 다가선다. 그날 기분에 따라 두 계단 혹은 한 계단으로 리듬 탄다. 성큼성큼 두 계단 또는 느긋느긋 한 계단이다. 지휘자는 발끝이다. 발끝이 눈 똑바로 뜨고 정면을 응시하느냐, 삐딱하게 사선을 노려보느냐에 따라 전달받는 근육이 다르다.      


발의 시선은 어떠한 경우에서건 운동 효과에 영향을 미친다. 정지상태건 움직이건 간에 발끝이 어디를 향하는지에 따라 몸의 결과가 판이하다. 안경 맞추는 직업은 눈만 보이고, 우산장사는 하늘만 보인다. 운동 좀 했다고 내 눈엔 발이 들어찬다. 길을 걸을 때 발을 훔쳐보는 버릇이 생겼다. 내 곁을 스쳐지나간 빅데이터를 분석해 보았다. 20대 추정 여성들은 팔자걸음, 50대 추정 여성들은 O자형 걸음이었다. 하체 근력과 골반 균형의 영향이 아닌가싶다(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아쉽지만 아직 마주친 인연이 없는 관계다).      


운동하기 전, 내 골반은 한 골반이 맞나 의심이 될 정도였다. 한 쪽이 단단히 삐져 비틀린 짝짝이였다. 걸음걸이는 도저히 시치미 뗄 수 없는 심한 팔자 모양이었다. 신발 바닥을 맞닿으면 팔자로 움푹 파여 굽을 갈 정도였으니까. 이젠 신발굽이 평행선을 달린다. 이 걸음걸이로 근력운동 효과까지 본다. 굽 갈은 지도 까마득하다. 틀어진 골반과 팔자걸음을 보면 혹여 통증이란 놈이 그들 팔자에 끼어들까싶어 내 동공도 운동을 한다.


필사를 하면서 손가락 근력이 좋아졌다. 속도는 물론 필체도 라인이 잡혔다. 구본진의 <필체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는 책도 있듯이 손가락이라고 무시할 일은 아니다. 낭독하면서 배 근육이 발달해 호흡도 좋아졌다. 운전할 땐 배도 신호대기에 맞춰 자극한다. 이렇듯 운동은 일상에 버무려지기도 한다('나 혼자 산다' 촬영하듯이 묻어나온다. 차차 공개한다). 뭐든 자연스러울 때 재미를 더한다. 





운동은 시간 없어 못하는 게 아니다. 시간보단 움직임 속에 의식이 없을 뿐이다. 운동은 '원래'란 단어를 앞에 갖다 붙일 일도 아니다. 운동은 아파야 꿈틀대고 간절해야 움직일 것도 아니다. 운동은 '너니까' 하고 '나니까' 못 할 것도 아니다. 운동은 내가 고른 포장지에 무얼 담을지의 문제다. 고통을 미래에 일시불로 지불하느냐, 지금 할부로 결재하느냐의 차이다. 내게 맞는 움직임으로 과정이 즐거우면 그게 바로 운동이다. 

     

운동을 해야 된다는 책임감보단 일상 리듬에 함께 태워 보는 건 어떨까. 혀, 식도, 위장, 대장은 물론 뇌까지, 내 몸을 이루는 신체기관들이 의식적으로 움직였다면 모두가 다 운동이다. 어릴 적부터 자주 듣던 말 중 하나가 "또 먹어?"였다. 내 소화 장기는 교통체증 없는 고속도로라 2시간마다 젖 먹는 신생아냐는 말까지 들었다. 소화기관이 불편한 이들에겐 거북한 소리일 수도 있겠다.      


머릿속 뇌를 굴리면 신체기관도 활발히 운동해 칼로리가 소모된다. 몸과 뇌는 같이 움직인다. 운동이란 피부부터 장기까지 모든 움직임을 아우른다. 사랑을 하면 심장이 마구 뛰는 것까지도. 운동은 근육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떨림을 인지할 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운동만이 살 길이라고들 하나보다. 상대의 떨림도 나를 살리는 길이다. 상대가 ‘시름시름’ 하면 내게 ‘싫음 싫음’ 소리를 안겨 준다. 


운동이 멀리 하기엔 너무 가까운 당신이 되었다. 내 호흡과 함께하는 친구가 되었다. ‘운동해야 되는데’로 간주점프는 일어나지 않을듯하다. 아마도 숨이 붙어있는 한 운동을 건너뛰는 날은 누구도 없을 것이다. 내 몸은 그 자체로 충분히 토닥토닥 상을 받을 만하다. 내 몸, 존재 자체만으로 눈물 근육이 자극될 때가 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일정이라도 몸동작을 AI 다루듯 하지 않는다. 움직임에 관심어린 눈으로 의식을 집중하면 근력운동이 된다. 명상하듯이 움직임에 의식을 부여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도 이런 리듬이 베어 나오길 바라면서. 움직임에 ‘의식’ 옷 입히는 일, 이 의식행사만 거행하면 그만이다. 내 몸에 의식하기에도 바쁘다. 남 의식할 겨를도 없이. 생각만으로도 콧노래와 어깨춤이 흘러나온다면 운동 하나는 채운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TV 속으로, 휴대폰 속으로 풍덩하지 말고 내 팔다리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 이왕 걷는 거 얄리얄리얄랴셩 얄라리얄라도 흥얼대자. 두 다리도 ‘포르테’가 된다. 지금 이 순간 나만의 운동개념에 기꺼이 발목 잡혀 보는 건 어떨까. 운동에 자신감 붙어 근자감이 아닌 ‘운자감’이 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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