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목숨 하나 참 질기기도 하네”
라는 말은 어느 정도 나이가 지긋하거나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 내뱉는 말이다. 어찌됐건 세상에 태어나 시간이 무르익은 뒤에나 붙는 말이다. 그런 걸 난 세상 구경을 하자마자 들었다.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아빠와는 낳지 않기로 합의 되었다. 낳아서 굶어 죽이는 게 아이에게는 더 큰 고통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부모님과 오빠가 겨우 들어가는 단칸방에서 그들도 먹을 게 없어 끼니를 건너뛰는 날이 많으니 입 하나 보태는 건 큰 부담이었다. 고양이 쥐 생각 발상인 것도 같지만 오죽 했으면. 더군다나 엄마는 나를 임신하고 실신과 구토를 일삼았다. 벌어먹는 일거리마저 떨어지면 안 될 판이었다.
아이가 먼저 떨어져 나가도록 엄마 입 속에 약을 털어 넣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동은 수그러들지 않고 그 단칸방에서 출산의 진통은 시작되었다. 엄마는 밥보다 약을 더 열심히 먹었는지 불러다놓은 산파가 무색하도록 힘을 주지 못했다. 아이 머리가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엄마는 또 실신했다. 어깨까지 빠져 나오고 좀 실신하지 타이밍도 참. 아이는 목이 졸렸다. 아이가 막상 세상에 태어나니 이러다 죽겠다 싶어 그 순간 인간의 초인적 힘이 나왔다고 했다. 그야말로 엄마는 젖을 먹이기도 전에 젖 먹던 힘까지 썼던 것. 그렇게 난 약물복용과 목 졸림을 선행학습 하며 이 땅에 태어났다.
이 이야기는 내가 돈을 벌면서 알게 되었다. 집안 밑천을 대니 안 낳았으면 큰일 날 뻔 했다는 생각에서인지. 그날 이후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순종형’이란 별명이 따라붙을 정도로 어떤 상황에서도 콩쥐처럼 지내리라.
태어날 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이번에는 자동차가 말썽이었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교통사고를 3번 당했다. 6살 때는 생선 파는 용달차에, 열두 살에는 대형 트럭에, 그 사이에는 오토바이에 치였다. 운전자가 엑셀과 브레이크를 반대로 밟았다든지 초록불 보행자 신호를 그냥 지나친다든지 우회전 급커브를 해서 당한 것이니 진정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 많은 승용차도 다 피해가고 자동차도 참 특별하다, 이 역시 내 의지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실신해 유리파편이 박혀 피투성이가 되거나 몸이 공중 부양하다 뚝 떨어져 피멍이 잔뜩 들어찬 통에 중환자실 신세를 졌다. 두 발로 멀쩡히 걸어 퇴원했으니 살아있음에 감사한 농도는 더욱 짙어졌다.
중고등학생 기념인지 그때부터는 염증을 달고 살았다. 구내염은 입술 안쪽을 떠나 입천장, 잇몸, 혀의 바닥과 뒷면도 모자라 목구멍 길목까지 골고루 발생해 기본이 6개였다. 임파선염, 편도선염은 자동 따라붙었다. 위궤양으로 속에서 경련이 일어날 땐 아파서 등을 펼 수조차 없었다. 이제 보니 위내시경도 남들보다 앞선 선행학습인 셈. 그것도 수면 아닌 눈 시퍼렇게 뜨고 하는 내시경이었다. 만성기관지염으로 기침하느라 밤에 잠을 설치고 못 자니 더 낫지 않는 악순환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자판기 커피로 몽롱한 정신을 달랜 이유다. 마약성분이 든 약을 먹고 등에 기관지확장제 패치까지 붙였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기 전날에는 특별히 기관지확장제가 들은 링거액을 맞아 합격엿을 대신했다. 사람이 한결같아야 한다지만 어디 일관성을 유지할 게 없어 엄마 뱃속에서부터 먹던 약을 나와서도 달고 사나 싶었다.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인 20대를 이렇게 꽃 같이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