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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시퀸 이지 Apr 28. 2020

바닥 치던 인생, 이제 안타 치다.

-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한 푸시업(push up) -

난 ‘숫자’에 약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진 몰라도 숫자에 있어서는 계산보다 기억이 우월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다. 현 나이에 숫자 옷을 입혀 보았다. ‘교통사고 3번, 이사 22번, 직장모유수유 27개월, 경제활동인구 22년차’란 결과가 도출된다. 물은 셀프라더니 세숫대야에 물 받아 셀프 산후조리도 2달 했다. 출퇴근 왕복 3시간 고려해 아이스박스에 젖병 담아 모유수유를 했다. 가방끈으로 따진다면 둘러메는 축에도 못 끼는 손가방 학력인데다, 30대에 반란을 일으킨 몸에게 책임을 추궁하고자 숫자놀음 좀 했다. 성인식 이후 지금까지 ‘경제활동인구’는 고정불변의 값일지언정 내 몸은 변화무쌍했다. 


난 위장염, 구내염, 기관지염, 임파선염, 비염, 결막염, 방광염, 봉와직염 등등 염증을 달고 살았다. 염증은 일 하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어 차치하더라도 신경 거슬리던 게 하나 있었다. 30대에 척추관협착증과 퇴행성이 동시에 찾아와 척추만 2배 나이로 껑충 뛰었다. 신경 눌린 저린감은 두 다리를 에워싸며 사타구니까지 이어졌다. 하지정맥류 수술은 두 번이나 받았다. 하반신만 요란 떤 건 아니었다. 상반신은 주동자가 누군지, 목을 중심으로 날갯죽지며 겨드랑이, 어깨, 팔, 뒷골, 정수리, 눈 가장자리까지 통증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주5일 근무제는 주말 병원으로 되돌려주었다. 사지 방사통은 신경차단술, 경락마사지, 스테로이드 주사와 물리치료로 돌려막기를 했다. 


이에 질세라 한 집 사는 부모님과 아이도 병원과 심리치료실을 빈번히 드나들었다. ‘방사통’은 내 몸에만 국한된 단어가 아니었다. 나부터 일어서자는 생각으로 마흔 하나에 헬스장에 입문했다. 운동기구는 빛 좋은 개살구요, 통증은 제자리걸음만 했다. 답답함에 PT(개인트레이닝)를 받게 되었다. 몸뚱이는 맥아리가 형편없는데다 체형까지 불협화음이었다. 어깨는 좌우가 다르게 말려 들어갔고 골반은 비틀려 있었다. 기생충 같은 통증을 때려잡으려면 힘과 균형이 필요했다. 그때 눈에 담긴 장면이 푸시업(팔굽혀펴기)이다. 전기충격기처럼 생긴 도구를 양 손으로 잡고 “훅~훅~” 거리며 푸시업 하던 남성이 동공 안으로 훅 들어왔다(동작이 눈에 들어온 거지, 남성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바닥에서 푸시업, 믿기지 않아 사진으로 잽싸게 남겨 놓았다.



발바닥 전체로 땅을 미는 스쿼트 하나도 못하는 주제에 발가락으로 땅을 딛는 푸시업이라니. 아주 뱁새 나셨다. 팔 힘은 학창시절부터 한결같게도 매달리면 1초 만에 땅에 도착했다. 뼈마디며 근력이며 어디하나 봐줄 만한 곳이 없었다. 근력은 근력대로 하체, 등, 배(코어), 어깨... 부위별로 대공사 들어갔다. 처음엔 양손으로 벽을 밀었다. 다음엔 벤치를 밀고 급기야 땅까지 내려왔다. 바닥에서 다섯 개, 열 개, 점차 숫자를 늘렸다. 스무고개도 넘고 이젠 한 번에 쉰 개까지 한다(자칭 ‘쉰들러’). 땅과 이룬 수평관계에서 한 단계 더 나가 두 발을 어딘가에 얹고도 하고, 가방을 업고도 한다. 


푸시업은 이름 그대로 자신감을 푸시(push)하고 자존감을 업(up) 시켰다. 2017년, 벽에서 바닥에 이르기까지 기른 힘으로 2018년에는 바디프로필을 찍었다. 환자로서 불가능한 동작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미는 힘은 글 쓰는 악력까지 전해져 2019년에 책을 출간했다(척추나이처럼 글쓰기도 30년을 껑충 뛰어넘었다). 푸시업은 ‘죽어도 안 될 것만 같은 일’,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세상’도 들어 올렸다. 내 품에 안겨준 게 이리 많은데 하루살이 푸시업을 저버릴 이유가 없다. 100개 푸시업을 외면할 명분도 없다. 



< 턴의 미학 > 출간, 운동으로 가동범위 한계를 넘어선 후 내면을 표현하는 한계도 넘어서기로 했다.   



푸시업을 하면서 바닥 치고 올라서는 맛, 온몸 들어 올리는 멋을 느꼈다. 나 같은 사람도, 삶에서 밀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구나. 내가 걷던 길엔 ‘당기시오’ 문만 존재한 것 같았는데, ‘미시오’ 문도 있구나. 팔을 구부릴 때마다 감정이 벅차올라 아코디언 연주를 했다. 감정은 고사하고 푸시업이 전신운동이다 보니 틀어진 몸도 데칼코마니를 이루었다.      


(*푸시업은 대체로 가슴운동으로 활용한다. 나는 말린 어깨, 거북목, 사지 통증으로 날개뼈를 뒤로 젖힌(후인) 상태에서 목부터 등, 허리, 배, 하체의 정렬과 힘을 유지하며 전신운동으로 활용하고 있다.)


맛과 멋, 균형을 이렇게 논할 수 있는 건 통증도, 염증도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난 손목은 가늘고 팔뚝은 굵었다. 여리여리와 호리호리가 들러붙은 모양새였다. 작용 반작용의 힘으로 팔뚝에 근육이 붙었다. 팔뚝이 뭐야, 겨드랑이를 중심으로 윗가슴, 날개뼈 주변까지 압축포장 했다. 나풀대던 살들은 관성의 법칙으로 제자리를 고수한다. “팔에 닭다리 붙였느냐”, “그래, 네 팔뚝 굵다”는 소리도 졸업 했다. 푸시업 3년 개근으로.      


모든 사람은 다리를 뻗는다. 나는 사람이다. 고로, 나는 다리를 뻗는다.      


다리 뻗을 공간이 존재하는 한 바닥과 마주하는 일은 무덤까지 갈 것이다. 바닥은 타자의 등이 되기도 한다. 등을 밀어도 주고, 밝혀도 주기 위해 난 오늘도 바닥을 밀어제친다. 창 밖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내 안에 폭풍이 들이닥쳐도 낮은 자세로 몸을 굽실댄다.      


우물에 늘 물이 고여 있지 않다. 언젠가는 물이 메말라 바닥을 드러낸다. 바닥을 일찌감치 본 자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투지로 올라갈 일을 꿈꾼다. 언제나 물이 있으리라 여긴 자는 바닥을 맞딱드리고서야 땅을 치고 후회한다.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을 것이다. 푸시퀸 답게.    

누군가의 삶을 push하고 up시키는 일이야말로 하늘을 나는 일이다.

‘걷는 하정우, 뛰는 하루키, 나는 푸시퀸’, 함께 미는 세상을 꿈꾼다.       


만약 푸시업 대회에서 수상을 하게 되면 이런 소감을 전하고 싶다. ‘내 주제에 무슨’이란 생각을 ‘내 주제’로 만들어 주어 감사하다고. 숫자에 연약하지 않고 즐길 줄 아는 계산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굽힐 때 흘린 짠내 눈물은 단내 눈물로 펴는 사람이 되었다고. 숫자놀음 인생이 삶의 스승이었다고. 꼭 말하고 싶다.


이런 얘길 해도 될까 모르겠으나, 이때보다 시간이 흐른 지금...힘이 더 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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