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에서 산 마르틴, 갈림길

나무빛으로 걷다

by 푸시퀸 이지

어제 2인실 알베르게에서 푹 잔 덕분일까, 아니면 자기 전 하체 근력운동을 마친 덕분일까. 몸과 마음의 점수는 10점 만점에 9점. 주유소를 방금 막 들른 승용차가 된 듯했다. 레온 12세기 순례자 쉼터였던 곳이 지금은 호텔로 변신 중인데 건물 외벽에 설계도를 붙여 공시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투명성과 책임성이 담보된 이 건설 현장에서 야심차게 출발했다. 아이 전공 때문인지,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 건축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까스티야 이 레온 주의 주도인 레온을 빠져나가는 길은 내가 결코 주도할 수 없는 길이었다. 화려한 시내에서 노란 화살표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으니. 왕성한 체력을 화살표 보물찾기에 쏟아 부을 판이었다. 그 와중에 가로등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마치 살사 댄스를 추는 듯한 빛이었다. 빛의 도시 레온을 떠나려니 온통 빛만 보였다. 나 자체의 빛은 아직 부족해 어제 산 형광색 옷의 힘을 빌려본다. 바닥에도 공중에도 보이지 않던 까미노 표식은 시내 끝자락에 와서야 레온의 상징인 사자 문양과 함께 뭉텅이로 나타났다. 이틀간 정든 레온에게 안녕을 고했다.





조명에 의존하던 빛은 자연스레 태양으로 넘어갔다. 해돋이 바탕에 구름 연필로 스케치한 하늘을 등지고 걷다 보니 라 비르겐(La Virgen) 성당이 나왔다. 성당 안에 있어야 할 12사도를 밖으로 모신 참신함이라니. 성당스럽지 않은 성스러움이 묻어 나오는 그곳에서 마음을 뺏겼다. 성당 앞 갈림길, 먼저 문을 연 바(Bar)로 향했다. 그곳의 또르띠야는 오늘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레온을 지나니 인간의 양가감정처럼 갈림길이 많아졌다. 자연과 마주하는 순간, 하루 못 본 그리움에 더 깊이 와락 껴안게 되었다.





나뭇가지에 걸린 해에 꿈을 낚은 듯 기세등등한 초록 나무와 푹신한 이불을 깐 듯한 갈색 풀에 시각이 활짝 열렸다. 진한 향기가 부르는 소리에 존재를 알아챈 작디작은 노란꽃에 후각은 완전히 개방됐다. 간밤에 내가 자는 사이 비가 몰래 다녀간 모양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먼지 없이 납작 들러붙은 땅과 잿빛 구름이 그 흔적을 증언하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 들뜬 내 머리에 새집처럼 교회 지붕에 지은 새집은 그 자체로 머리모양이었다. 하도 귀여워 새가 지었는지, 사람이 지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동물과 공존하는 세상, 그걸로 족했다. 찻길 옆 조각상을 둔 집들도 그 자체로 미술관 같았다.




1시간 지나 구름 마음이 풀렸다. 뭉친 구름은 수제비 반죽처럼 뚝뚝 떼어 하늘은 땡땡이가 되었다. 유명한 길들에 비해 오늘은 그저 그런 길일 수 있지만, 빛이 파고드는 나무들의 숨결은 예술이었다. 팔순 아버지의 머리카락 같은 나무, 금은보화가 열린 듯한 럭셔리 나무. 빛으로 그린 이 보석 같은 풍경들은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 옆길조차 찬란하게 만들었다.




알베르게를 1시간 남겨두고 급한 방광을 해결하려 비야당고스(Villadangos)의 한 바로 돌진했다. 결혼식 피로연장만큼이나 크고 격식 있는 곳이었다. 화장실을 해결한 뒤 별 기대 없이 시킨 레몬워터와 미트볼(2.5유로). 일어서려는데 방금 막 튀긴 접시가 나왔다.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향기에 이끌려 주문한 오징어튀김 한 접시. 손가락만 한 튀김 10개에 고작 1.5유로라니! 제사 때 갓 부친 전을 먹는 듯한 이 맛은 스페인 튀김 중 단연 ‘대상’감이었다. 레온에서 먹은 어니언링 4개보다 4배나 싸다니, 이런 카타르시스도 자연의 감탄과 같은 결이었다.


잘 먹고 나왔더니 또 갈림길이다. 화살표가 보이지 않아 당황하던 차에 현지 남성에게 길을 물었다. 모른다는 그에게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두 번이나 검색해 길을 찾아주었다. 그가 떠난 후 실로 ‘괜찮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인도가 끝나고 화살표가 사라졌다. 방광을 비운 기념으로 사과를 씹으면서 왔는데 졸지에 돌 씹은 기분이었다. 당황해서 앞에 서 있던 남성을 불렀는데, 아뿔싸! 그 역시 나와 똑같이 사과를 씹으며 길을 잃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형광색 티셔츠까지. 거울을 보는 듯했다. 그때 길 건너 갈림길, 3층 창문에서 산신령 같은 분이 나타나 지휘자처럼 손가락을 휘저으며 길을 알려주었다. 그의 손가락 지휘봉대로 찻길을 건너 또 다시 등장한 갈림길을 무사통과했다.




평소엔 등한시하던 화살표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됐다. 이제는 상업성을 띤 노란색 화살표까지 가려내는 눈까지 생겼다. 5km를 남기고 길을 잃은 걸 보니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교통사고도 높은 속도가 아닌, 60km에서 가장 사고가 빈번하다고 한다. 주변 두리번대고, 말할 거 다 하는 방심의 속도라서. 길을 잃을 땐 심장 소리가 그토록 크게 들리더니 길을 찾고 나서야 발과 새소리 화음이 들렸다. 함께 길을 잃었던 '브라질 사과님'은 안심이 됐는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걷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칭찬과 함께. 나보다 한참 연배가 높으신 그의 나이(78세)를 듣고 깜짝 놀랐다. 동년배로 봤으니 길도 잃고 사과와 형광색 맞춤에 내 눈이 헤까닥 뒤집혔나 보다. 그나저나 까미노 천사를 세 명이나 만났으니 그동안의 자책은 거두고, 이제 당당히 ‘길치’ 하기로 했다.





늘 보던 옥수수밭은 추석맞이 때때옷을 입어 더욱 고왔다. 뒤태와 다른 나무의 앞모습, 하늘하늘 마음까지 간질이는 풀. 결국 나무로 시작해 나무로 끝났다. 나무 감상하다 우연찮게 들여다본 곳이 바로 내가 묵을 알베르게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산 마르틴 델 까미노까지 나무가 데려다 주었다. 사장님의 어린 딸까지 예뻐 요가도 함께 했다. 하지만 저녁식사로 알베르게에서 파는 순례자 메뉴와 고추장불고기는 14-15유로로 아기자기한 맛은 없는 것 같아 점심 가성비를 재탕해 보기로 했다.


허허벌판 속에서 간신히 찾은 바에 들어갔다. 샐러드와 에그스크램블, 접시에 납작 엎드린 양은 간에 기별도 안 가는데 18유로나 한단다. 그 넓은 공간에 손님이라곤 나 혼자였으니, 바가지 쓴 기분을 ‘유아독존 바에 치른 자릿세‘이자 ‘알베르게 배신비용’이라 덮어썼다. 역시 바는 사람 많은 곳으로 갈 것!





좋은 건 계속 좋을 순 없다. 나쁜 것도 계속 나쁜 건 없다. 바 근처에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가 있어 밴드 근력운동도 하고, 지는 노을까지 감상했으니, 그 값이 그 값이다. 반면 아기자기했던 숙소는 비누도 없고 휴지도 채워주지 않는 데다, 철제 침대는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빛의 도시 레온을 거쳐 빛바랜 풍경 속에 이른 오늘. 문득 추석 직후 치러내던 국정감사와 성과보고서들이 떠올랐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그 순간들이 이제 보니 1년 치 회사농사를 잘 마치고 빛을 한껏 머금은 볏짚처럼 느껴진다. 떠오르는 태양 빛이 없으면 어떠랴. 보랏빛 새벽 속에서도 찬란하게 지는 보름달도 있는데. 내일 걸을 일을 생각하기에도 벅찬 밤. 저녁에 나온 알베르게 순례자 메뉴는 배가 터질 지경이라 음식이 남아돌았다는 말에 지금 당장의 내 배가 아플 지경인데.





*알베르게 루틴 밴드 근력운동

https://www.youtube.com/shorts/FH1Yk7t4Y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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