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시야에서 레온_기꺼이 당하는 비교

알아차림으로 걷다

by 푸시퀸 이지

오늘은 그 유명한 레온(León) 시내로 들어가는 날이다. 18km라는 짧은 거리지만, 대도시의 편안함에 취해 순례길 내내 팽팽했던 다리 근육의 긴장이 느슨해질까 봐 우려도 있었다. 남들은 여러 날 묵으며 힐링 타임으로 톡톡히 쓴다는데, 걱정도 팔자다. 사아군 이후로 줄기차게 카톡을 보내는 ‘달걀 퇴직’님의 식사 제안도 설렘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답장을 해도, 안 해도 불편한 이 잡념을 보니 어쨌든 잠은 잘 잤고 살 만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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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고리를 끊어준 건 뜻밖에도 보름달이었다. 평소 감탄하던 태양 대신, 오늘은 보름달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다. 응시하는 눈동자 같다가도 달걀후라이 같고, 지구본 같기도 한 달을 이토록 자세히 본 적이 있었던가. 까만 하늘에서만 빛날 줄 알았던 보름달이 초록 나무와 보랏빛 하늘과의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궁합에 뇌는 비로소 휴식을 맞았다. 하지만 휴식도 잠시, 바(Bar)를 보자마자 뇌는 '또르띠야'를 자동 반사했다. 빵 맛집(푸엔테 비야렌떼)을 제치고 들어간 곳에서 작고 짠 또르띠야를 마주하며 깨달았다. ‘바는 반드시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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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에 물들기 전 막바지 풀들로 감성 목욕을 하고는(아르카우에하) 레온으로 안내하는 파란 다리를 건넜다. 화려한 시내에 들어서니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길들이 낯설었다. 나를 남과 비교하는 건 질색이지만 맛을 비교하는 데는 진심이라 거대한 KFC 앞에 멈춰 섰다. 한국과의 다양한 비교를 위해 샐러드, 치킨, 햄버거를 맛보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알베르게 근처에서 먹던 스페인 로컬 햄버거가 여전히 으뜸이었다. 영어조차 당황스러운 키오스크의 무미건조함보다 스페인 사람의 향기가 묻어나는 바가 내게는 최고였다. 알베르게까지 남은 4km마저 도시보다는 자연이 데려다주었을 때 더 힘이 났다. 전생에 농부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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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는 시내 한복판의 수도원이었다. 18일 동안의 루틴—매트리스에 베드버그 스프레이 뿌리기, 시트 씌우기, 침낭 깔기—에서 벗어나 깨끗한 시트가 깔린 2인실 침대를 마주하니 ‘이래도 되나’ 싶은 죄책감이 의외로(순수성 vs 선한 척) 들었다. 번데기 침낭에서의 해방감으로 이제 나비처럼 날 줄 알았는데, 그새 그 고생스러운 과정에 정이 들었나 보다. (참고로 남들은 스페인까지 와서 베드버그 스프레이를 두세 통 더 샀다지만, 나는 한국에서 가져간 작은 스프레이 한 통으로도 여유 있게 썼다. 비싼 값을 치르고 베드버그에 물리지 않으면 괜히 손해인 것 같아,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믿음 하에 약을 쥐똥만큼 뿌렸다).


이번 레온행에서 가장 설레었던 곳은 가우디 저택(까사 보티네스)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하필 휴관일(화요일)이었다. 하룻밤 자고 다음 날 눈을 번쩍 뜨게 한 것도 바로 이곳이었다. 건축학을 전공하는 아이에게 보여주려 샅샅이 후벼 파듯 구경하고 가우디 자서전까지 샀다. 하지만 정작 아이는 건축과 멀어지고 있었다. 추석 때 친가에 다녀와 의대에 가라는 권유를 받아들여 재수를 결정했다는 아이와의 긴 통화. 자신의 가치와 사명보다 가족의 기대를 택한 것은 아닐까 못내 마음이 쓰였다. 순례길을 걸어야만 차단되던 잡념들이 문명의 도구인 휴대폰을 통해 절실히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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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잡고 방문한 이시도로 성당 박물관과 레온 박물관은 자연을 그리던 마음과 자긍심을 동시에 채워주었다. 이시도로 성당 박물관에서는 소장품 중에서도 성경책으로 가득 찬 방이 압도적이었다. 책장과 벽면에 숲처럼 둘러싸인 성경책들을 보니 그 옛날 말씀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듯했다. 레온 박물관에서는 로마 군단병 숙소가 인상 깊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묵는 알베르게와 비슷해서 반가웠던 모양이다(사실 내 방보다 그곳이 훨씬 깔끔했다). 레온(León)이라는 이름이 로마 군단의 '레기오(Legio)'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성당 문이 열리기 전 광장에서는 재래시장이 열렸다. 이 동네 주민이었다면 단박에 샀을 저렴한 과일과 채소들을 보며, 내가 떠돌이 생활자임을 자각하고 눈요기만 했다. 시장 천막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비는 쉬는 시간 없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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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거짓말처럼 비가 그친 뒤 들어선 레온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를 더 밝게 보라는 듯 태양과 구름이 극적으로 합의 본 광경은 압도적이었다. 기념품점에서 구리색 순례자 신발 열쇠고리를 샀다. 평소 ‘가성비’만 따지던 내가 이해 못 했던 ‘가심비’ 아이템을 가방에 매달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나를 발견했다. 길은 이토록 완고한 인간도 마법처럼 변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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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해진 날씨 덕에 소장하고 싶은 스페인 옷을 살 구실이 생겼다. 마음속 욕망은 이미 형광색 티셔츠를 점찍어두고 있었다. 중심지에서 멀어질수록 값은 저렴해 신시가지 등산 매장까지 흘러들어갔다. 50대로 보이는 남성 주인은 과한 친절 대신 조용히 기다려 주는 편안함을 주었다. 온갖 색깔과 사이즈를 입어보는 귀찮은 과정에도 박스째 가져와 재고 확인을 해주고 어깨선과 땀 흡수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바디 랭기지와 번역기를 열심히 돌리는 사이 휴대폰 배터리가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매장에도 없는 C타입 충전기와 멀티탭을 어디선가 빌려다 주기까지 했다. 햄버거 왕이 <산토 도밍고>였다면, 스페인 친절 왕은 단연 이분이다. 덕분에 새로 산 형광색 옷이 유난히 더 빛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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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살같이 흘러간 시간 끝에 잠시 덮어두었던 ‘달걀 퇴직’님과의 저녁 약속이 다가왔다.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혼자 걸으며 스페인 레스토랑 탐방을 하고 있다”는 그의 말이 불편함의 한 구석을 차지했다. ‘내면을 들여다보려고 아내를 두고 혼자 왔다’는 말도 부담감을 보탰다. 처음 보는 남성과 단둘이, 내키지 않는 비싼 레스토랑에서, 더치페이를 하며 식사하는 모든 장면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거절의 말을 고민하던 찰나 카톡이 왔다.


달걀: 제가 레온에서는 아파트에 며칠 머물게 되었어요. 맛있는 것 장 봐서 여기서 같이 드시는 건 어때요?

이지: (레스토랑이어도 갈까 말까인데 아파트라니!) 어제 저녁인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이셨군요. 오늘은 일정이 있고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해서 부엔 까미노 되세요.


연락은 이로써 The End. 신기하게도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꾸 마주치던데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모습은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까르푸에서 장 본 바게트에 치즈와 아보카도 무스를 얹어 배가 터지도록, 아파트도 아닌 알베르게 주방에서 저녁을 꽉꽉 채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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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길과 대비되는 대도시, 순례길 도보를 멈춘 하루. 고독과 루틴의 자유를 넘어선 관계와 편리성. 멈추면 비로소 보였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꺼려하는지 알아차리는 날이었다. 걷지 않아 재발한 고관절 통증마저, 절대 가치를 정하기보다 상대 비교가 쉽고 효율적이라는 뇌의 본능을 일깨워 주었다. 어차피 그럴 바엔 오늘 겪은 비교를 ‘알아차림의 훈장’으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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