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르틴에서 아스토르가, 뒤끝 작렬, 여운 정열

분위기에 취해 걷다

by 푸시퀸 이지

미련스럽게도 저녁 식사에 미련이 남던 산 마르틴 델 까미노의 알베르게는 6유로에 아침 식사도 제공했다. 하지만 한 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자. 어제 18유로라는 바가지를 쓴 마당에 6유로까지 보탤 순 없었다. 얼마 전 사둔 비스킷 봉지를 주섬주섬 열어 마치 두 끼는 굶은 사람처럼 먹어댔다. 이 길은 진정 나를 증명하는 곳이다. '식탐'과 '가성비'를 끝내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저 그게 나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먹방 유튜버를 해보라던 농담 섞인 말들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오늘은 어디를 얼마나 걸을지가 아닌, 어디서 얼마나 먹을지를 기대하며 아스토르가를 향해 첫발을 디뎠다.


화장실과 주방 물도 마시는 이곳에 와서 생수조차 귀하게 여기게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물을 공급하는 커다란 급수탑마저 성스러워 보였다. 이번에는 흐르는 물 위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아치형 중세 돌다리인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다리에 닿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레온 기사가 목숨 걸고 결투를 벌였다는 전설이 깃든 곳인데, 나는 이 다리를 무려 두 번이나 건넜다. 또르띠야 맛집이 다리 건너기 전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기사도 정신'으로 격렬하게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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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킷이 뱃속에서 불어나고 있었지만, 또르띠야 전사처럼 전투적으로 두 개를 해치웠다. 달걀, 감자, 양파라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까르보나라 소스의 풍미와 시금치 향이 어우러진 그 맛을 어찌 두고 간단 말인가. 값도 3유로밖에 되지 않아 반값 세일 느낌이었다. 몸이 굴러갈 정도로 먹고 나서야 강물을 하나하나 훑으며 도돌이표처럼 다리를 다시 건넜다. 강한 신념과 용기로 나 역시 사랑을 쟁취했다. 알고 보니 다리 건너편 바는 강물 뷰 값까지 보태 음식값이 몇 배나 비쌌다. 사진 속 달덩이가 된 얼굴이 나의 만행을 증명하고 있었다. 여자의 변신이 아닌, 위장의 변신은 무죄다! S자 길에 매료되었듯, 굽이치는 S자 강물은 나를 더욱 흥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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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Órbigo). 지난번 하몽(Jamón)을 자몽으로 읽었던 전적이 있어, 이번엔 'H'가 묵음인 '오스피탈'을 신경 써서 제대로 읽었다. '병원'이라는 뜻을 품은 이름답게 과거 순례자를 돌보던 온기가 남아서일까. 알베르게와 가게들이 늘어선 역사 깊은 마을은 마치 동화 속 같아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어제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바'와 대비되는 이곳의 풍요로움 앞에서 나의 옹졸한 뒤끝과 다시 마주했다. 마을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질 때쯤, 양 떼들이 축제라도 벌이듯 길을 가득 메웠다. 들판에서나 놀 줄 알았던 양들이 동네 길을 점령하다니, 마을 구석구석, 참 여러모로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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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토르가로 향하는 시골길의 집들은 하나같이 개성 넘쳐 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고개를 쭉 빼고 담장 너머 집 구경을 하다가 본능적으로 직진한 탓에 길을 잃었다. 앞뒤로 아무도 없고, 저 멀리 산길 위에 배낭 멘 사람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작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가 길인 건 알겠는데, 어떻게 저기까지 가야 할지 막막했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를 잃었다고 떠드는 듯한 혼란이 찾아왔다. 예쁘면 다인가, 어째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나 싶을 때쯤 마을 주민을 발견했다. 또르띠야 맛집을 찾을 때처럼 허겁지겁 달려가 그를 멈춰 세웠다. 양옆, 위아래 진자가 움직이듯이 길쭉길쭉한 시골길과 밭을 오르내리며 마치 메세타 고원의 끝물을 걷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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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언덕은 아니면서 은근슬쩍 힘을 빼놓는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길을 잃었다는 당혹감과 뒤처지지 않으려는 조급함은 체력을 무섭게 갉아먹었다. 지루함이 밀려올 즈음 32세의 홍콩 여성을 만났다.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다 스트레스로 퇴사했다는 그녀와 과거, 현재, 미래를 메세타 고원만큼 길고도 깊게 이야기했다. 이게 가능한 건 고맙게도 그녀가 한국영화를 좋아해 한국어 실력이 늘었기 때문이다. 사실 어제 점심, 4유로의 행복을 만끽하던 바에서 그녀를 눈여겨봤었다. 나는 귀가 트이고 그녀는 입이 트이니,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시간이었다.


과일과 빵 등을 기부제로 운영하는 재미난 바가 나타났다. 그녀는 바나나 하나를 먹고 가겠다 했고, 나는 아침부터 먹은 또르띠야 두 개에 대한 양심을 지키고자 직진을 택했다. 우리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이어 만난 67세의 호주 여성은 내게 새로운 동경을 심어주었다. 건강미 넘치는 팔다리를 드러내고 무거운 짐을 진 채 씩씩하게 걷는 그녀는 '나이듦의 본보기' 같았다. 걷는 것이 마냥 좋지는 않은 나지만, 저 나이에 이 길을 다시 걷는 나의 모습을 잠시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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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십자가 동상 너머로 아스토르가 마을이 배경처럼 깔렸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곳엔 건축가 가우디의 <주교궁>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건축에 대한 미련은 아들보다 내게 더 큰 모양이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기찻길이 나타났다. 조물주가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사람을 빚었듯, 기찻길의 철을 하나하나 떼어내 정성스레 빚어낸 것 같은 사람 조형물이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순례길은 마지막까지 인내심을 시험했다. 다 왔다고 생각한 순간 나타난 초록색 철길 다리는 직선이면 금방일 거리를 좌우로 갈지자를 그리며 길게 늘어뜨렸다. 마치 똥개 훈련이라도 시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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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아스토르가 마을에 도착해 방심하고 있던 찰나, 구시가지를 관통하는 급경사는 햇볕 쨍쨍한 날 맞는 소나기처럼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언덕 초입에 걸린 태극기를 보며 다시 힘을 냈다. 언덕 위 공립 알베르게는 7유로라는 가격이 믿기지 않을 만큼 품격 있었다. 마치 회사에서 출장을 나온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18유로의 바가지를 떠올리며 감사한 마음으로 기부금을 보탰고, 80대로 보이는 오스피탈레로의 정성 어린 사명감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다시 내려가기 귀찮아 저녁을 굶을까 고민도 했지만, 모든 볼거리와 먹거리는 이미 언덕 위 광장에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광장에서 즐긴 3유로의 군밤, 8유로의 치킨 샌드위치와 와인은 그 값의 몇 배를 줘도 아깝지 않을 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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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과 초콜릿 박물관 등 유혹이 많았지만, 나는 가우디의 <주교궁>에 모든 것을 '몰빵'했다. 본게임에 들어가기도 전, 주교궁 입구와 그 주변의 풍경만으로도 지친 다리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중앙 홀부터 다섯 개의 실을 1층부터 차례대로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전시된 작품들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한 땀 한 땀 빚어낸 가우디의 숨결에 내 숨이 멎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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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기둥, 창문이 부드러운 선율처럼 연결된 구조에 마음을 뺏겼다. 특히 은은한 흰색과 회색빛 돌 벽은 '화려해야만 빛나는 게 아니'라는 진리를 일깨워 주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그 자체로 나뭇잎이 눈앞에서 나부끼는 듯했다. 엘리베이터도 있었지만, 창문 이음새와 구조물들이 파도처럼 연결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싶어 일부러 계단을 올랐다. 오를수록 온몸은 뜨거워졌고, 꼭대기에 이르러 감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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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공간과 주거 공간을 거쳐 신성 공간에 이르기까지, 가우디는 아름다움 속에 기능의 질서를 심어두었다. 미적인 감각과 정리 정돈이 취약점인 내게, 가우디가 보여준 이 완벽한 조화는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효율만을 따지는 현대 사회보다도 앞서 '일-삶-혼'을 하나로 효율화시킨 옛 거장의 세계를 보며 성경의 한 구절이 스쳤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글로 만나는 독자들도 부디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한 사람’이길 바랄 뿐이다. 6유로의 입장료로 600유로치의 감동을 얻었기에 잠들기 전 어둠 속에서 <주교궁>을 한 번 더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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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느꼈던 상실감을 알베르게와 근사한 저녁, 그리고 가우디의 예술로 만회한 하루였다. 역시 계속 나쁘기만 한 건 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위기에 취한 이 길은 나의 식탐을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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