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힘으로 걷다
오늘은 출발지로 글을 시작하고 싶지 않다. 하루 전체를 통틀어 '퍼펙트 데이즈'였기 때문이다. 순례길의 대도시인 폰페라다로 향하는, 일출의 대명사 폰세바돈과 순례길의 상징 '철십자가', 그리고 무릎을 시험하는 가파른 내리막 여정을 ‘모른 채’ 덤벼들었다가. 내내 주체할 수 없는 심박 수의 고동을 느꼈다. 지금 글을 쓰는 손끝마저 떨린다. 자, 침착하게 출발!
의미 있는 곳에서 태양과 근사한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6시30분에 길을 나섰다. 이마에 헤드랜턴을 동여매자 세상에는 오직 한 줄기 불빛과 나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발소리와 숨소리에 기댄 채, 허벅지 근육의 긴장도로 지형을 가늠하며 일정한 박자로 걸었다. 어둠 속에서 감각은 평소보다 예민하게 날을 세웠다. 요며칠 신발 깔창 없이 자갈밭을 걸어 생긴 발바닥 물집도 밀어낼 만큼 진흙 위를 걷는 듯 부드럽게 느껴졌다. 곁에 있는 게 계곡인지 산인지 숨결로만 짐작하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고요'는 '불안'을 밀어냈다.
발치에 포착된 작은 벌레 한 마리에 급브레이크를 밟듯 멈춰 섰다. 예전의 나였다면 '휴, 밟지 않아 다행이다'였겠지만, 지금의 나는 "지금만 발견할 걸까"를 자문한다. 찰나의 인연에 그치지 않고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까지 확장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숲을 벗어나자 돌로 된 십자가가 응원 차 서 있었다. 해는 지평선에 붉은 숄을 드리우며 등장했고, 기막힌 타이밍에 맞춰 바(Bar)에 들어가 삶은 달걀까지 기차게 먹었다(폰세바돈). 마치 긴 시간동안 바에 머무른 것처럼 문을 나서니 세상은 훤했다. 눈부신 바깥 공기에 땀 절은 몸이 이가 부딪칠 정도로 떨려왔다. 하지만 ‘설렘’이라는 연료는 이미 내 몸속 ‘열정’에 불을 지폈고, 외압의 추위를 밀어냈다.
추을까봐 나타난 오르막, 땀 위에 또다시 땀이 포개졌다. 태양 위에 태양도 지층을 이루는 듯했고 눈동자 같던 태양이 뒤집히기까지 했다. 이곳에 오기 전 매직기로 정성껏 폈던 머리칼은 태양이라는 열기구에 구워져 스프링 노트처럼 말려 올라갔다. 소프라노 앝토 콩나물처럼 몇 번 오르내린 끝에 해발 1,505m의 <철십자가(Cruz de Ferro)>에 닿았다.
누군가는 고향에서 가져온 돌을 놓으며 마음의 짐을 덜고, 누군가는 소중한 이의 안녕을 빌며 물건을 놓아둔다. 나는 일상에서 품어온 그 간절한 원칙들을 그곳에 그대로 꺼내 놓았다. 그저 철 십자가처럼 우리 모두의 내면이 단단해지길.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들, 감격에 겨워 서로를 끌어안은 이들, 나 홀로 상념에 빠진 이들,... 돌멩이처럼 켜켜이 쌓인 저마다의 희노애락이 공기 중에 부유했다. 기쁨은 태양의 품에 자리하고, 슬픔은 세찬 바람을 타고 흘러가길. 이제 길은 '내려두기'를 제대로 했는지 시험이라도 하듯 본격적인 급경사 내리막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눈앞에 펼쳐진 가파른 길을 보니 보이지 않을 때보다 오히려 걱정이 앞섰다. 하체가 풀리진 않을까, 물집이 터지진 않을까. 그러나 이 길은 내 우려를 기분 좋은 반전으로 되갚아 주었다. 나는 스틱을 배낭에 꽂은 채, 아침 리듬 그대로 '다다다다' 경쾌하게 내려갔다. 복근과 햄스트링이 이루는 완벽한 하모니. 갈림길 중,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완만한 차도를 선택했다면 결코 맛보지 못했을, 일상 속 '틈새 운동'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직장 다닐 때 사무실은 17층이었다. 출근 때와 점심, 하루 두 번 오르내렸다. 5시간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맛과 멋으로 유명한 <만하린>, <푼토봉>, <아세보>의 바도 지나칠 정도로 가히 '스펙터클'한 하강이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앞에서 나는 순식간에 '풍경 스쿠루지'가 되었다. 이 압도적인 장면을 나 혼자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 유일한 답답함이었다. 해를 등에 업은 산맥이나 그늘에 숨은 산맥이나 그 자체로 최고의 작품이었다. 3년 전 스페인을 휩쓸었던 건조주의보와 산불의 흔적도 검게 그을린 채 남아 있어 가슴이 아렸지만, 그 상처조차 대지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내려가는 길은 이끼 낀 바위를 디디는 계곡 같은 곳, 줄무늬 암벽을 지반 삼은 미끄럼틀 같은 곳, 돌멩이를 잔뜩 뿌려 놓은 좁은 시골길 등 아슬아슬한 구간이 많았다. 만나는 사람도 다리길이 차이로 골반이 흔들리는 젊은이, 바위를 손으로 짚어가며 내려가는 노인, 종아리를 뒤로 접어 간간히 풀어주는 여인 등 다양했다. 모두에게 같은 태양이 비치듯 '걷는 존재'로서 모두가 하나였다. 해가 구름을 붙들어 비가 내리지 않은 점과 길 한쪽 구석으로 돌멩이를 치워준 누군가가 한없이 고마웠다. 다음 단계로 착착 진행되는데 희열을 느끼는, 나 자신의 값어치를 낮게 책정하는 자신을 다시금 깨달으며 철십자가의 영험함인지, 어제 들은 그레고리안 성가 기운인지 모를 에너지가 철철 넘쳤다.
결승선을 통과하듯 양옆으로 늘어선 나무 사이를 지나자 몸에 스친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뒤로 헛디디면 곧장 굴러떨어질 듯한 아찔한 산길이 이어졌다. 충만한 에너지로 가득 찬 내 앞에 거대한 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지니 숨이 멎었고, 발걸음도 멈췄다. 도저히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 산맥과 한참을 마주했다. 때마침 나타난 에스파냐 여성 '뮬라'와 인사를 나누고, 요가 나무 자세로 사진을 찍으며 이 순간을 기록했다. 그녀와 초콜릿으로 달콤함도 나누었다. 몰리나세카 표지판이 보일 즈음, 이국적인 풍경이 보상처럼 펼쳐졌다.
메루엘로 강을 끼고 중세다리를 건너니 줄지은 바의 풍경조차 한 폭의 그림이었다. 물이 흐르는 바에 앉아 화이트 와인과 오징어 튀김을 주문했다. 레몬즙으로 샤워 후 화이트 소스 옷을 걸친 오징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쫄깃했다. '해냈다'는 성취감은 와인 한 잔을 더 불렀고, 긴장 풀린 몸은 곁을 맴도는 고양이를 의자에 앉히고 싶은 망상으로 피어올랐다. 갈림길에서 지름길 대신 두 시간을 꼬박 강렬한 햇살과 맛서야 하는 길을 택하고 만 것을 보니, 이 길도 나의 고집을 바꿔놓지는 못하나 보다. 하지만 그 덕에 나만큼이나 느린 외국인들과 어울려 걸을 수 있었다.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인 <폰페라다>에 도착했다. 호텔처럼 쾌적한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섰다. 광장에는 위용 넘치는 '템플 기사단 성'이 있었지만, 나의 발길은 '엔시나 성당' 저녁 미사로 향했다. 기사도 정신은 좀 있는 것 같은데, 영혼은 여전히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돌아오는 길에 문을 연 마트를 찾아 샐러드와 치킨너겟으로 소박하지만 가성비 넘치는 저녁을 즐겼다.
가장 기억에 남던 <메세타 고원>이 인내를 시험하는 지구력 운동이었다면, 오늘 이 길은 한계를 오르내리는 인터벌 운동 같았다. <아세보>에서 택시를 부르는 이들이 많다지만, 택시비를 아낀 것보다 33km의 험로를 헤매지 않고 내 두 발로 똑바로 걸어온 그 여정 자체가 내게는 완벽한 성취였다. 완벽함이란 게 별건가. 남의 눈은 몰라도 내가 만족하면 그게 바로 완벽이지.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가 매일 아침 하늘을 보며 지었던 그 미소의 의미. 그가 느꼈던 충만함이 바로 지금의 내 기분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