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쓸며 가슴 쓸다

아버지, 란 이름으로 쓸고 쓴다

by 푸시퀸 이지

하루 두 번 빗질 했다.
출근 전 한 번, 잠들기 전 한 번.
빗질은 두상 바닥이 아닌, 방 바닥이다.
머리카락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발 디딜 공간을 침범했다.

광배근을 옴팡 덮고 있던 머리카락,
귀만 덮도록 허용하고 모조리 내리쳤다.
젊을 땐 연예인 사진으로 단발령을 내렸다.
이젠 미용실 주문사항이 바뀌었다.

"머리 빗질도 시원찮고 슝슝 다 빠지니
묶어버릇 하는 손모가지 습관
뜯어고칠만큼 잘라주세요"

이런 내모습,
내면의 성장인지 노화의 변장인지.
그러고보니 아버지가 연휴 전 출근길에
톡으로 보낸 글이 생각난다.

언제부턴가 모자를 자주 쓰던 아버지,
멋 낸다 생각했는데 두피 바닥은
발 디딜 틈으로 광활하기 그지없다.
머리 쓴 글로 가슴도 빗질 한다.

머리는 빠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곳에 다시 나느냐가 중요하다.
사람들 가슴에 '건강 모발' 이식 되길
바라고 또 바라며 내 가슴도 쓸어내린다.


* 1등 독자인 아버지, 그 덕에 브런치 수명을 연명했다.

아버지 글로 나의 하루도 연명한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친구가 안부를 묻기도 전에 이런 말부터 꺼냈다.
“자네 짱배기가 와 그 모양이고? 제초제를 덮어 썼나 훌빈하네.”
‘짱배기’는 정수리, ‘훌빈하다’는 듬성듬성하다는 경상도식 표현이다. 해석을 하자면 머리가 듬성듬성해 정수리가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말이다.

50대까지만 해도 머리숱이 울울창창했다. 어렸을 때는 더했다. 어머니는 머리가 이마를 침범해 좁은 이마가 답답해 보인다고도 했다. 그때 족집게를 동원해 확장공사를 벌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게 다 염색약 탓인가 싶다. 친구 말마따나 염색약이 아니라 제초제를 덮어 썼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염색을 하고 나면 머리 주변 피부가 거칠어지고 좁쌀 같은 종기가 돋아나기도 했다. 토양이 거칠면 풀이 자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흰머리는 가족력이다. 나는 아버지의 검은 머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만큼 젊어서부터 흰머리를 이고 사셨다. 나 역시 변장을 하지 않았으면 젊어서부터 아버지처럼 흰머리를 이고 살았을 것이다. 염색이 보편화된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도 30대 중반까지는 타고난 대로 그럭저럭 지냈다. 정 흰머리가 거슬리면 아이들 손을 빌렸다. 아이들은 흰머리 하나에 10원짜리 용돈벌이를 했다. 애들이 고사리 손일 때는 서로 죽이 맞았다.
애들이 크자 서로가 불만이었다. 애들은 씀씀이는 커지는데 단가가 고정불변이라 벌이가 시원찮다고 투덜거렸다. 애들은 꾀를 내어 한꺼번에 두 개씩 잡고 뽑았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그래도 흰머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검은 물의 유혹에 넘어갔다.

짱배기가 훌빈하다는 소리를 듣고도 염색을 곧 그만두지 못했다. 그때는 작으나마 사업을 할 때였고 상대는 주로 나보다 젊은 사람들이었다. 가끔 만나서 술도 사고 돈도 집어주어야 관계가 유지되던 때였다.
60대 중반에 사업을 그만두었다. 염색을 중단할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중단할 수 없었다. 변장이랄까, 위장이 들통 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것은 소문이었다. 사업을 그만둔 데다 머리까지 백발이 되면 사업이 쫄딱 망한 걸로 알기 십상이며, 그래서 폭삭 늙었거니 할 것이었다. 늙고 망하기까지 하면 누가 가까이 하겠는가.

차일피일하다 70대에 이르렀다. 그새 짱배기는 더 훌빈해졌다. 마침 이때 전염병이 돌았다. 전염병이란 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병이다. 부득이 사람에게 다가가려면 마스크를 써야 하는데 그게 여간 귀찮지 않다. 따라서 집에 있는 시간이 늘 수밖에 없다. 옳지, 때는 이때다 하고 염색을 중단하는 결단을 내렸다.

처음에는 거울 앞에 다가서기가 두려웠다. 나는 낯을 가리는 편인데 혹시라도 거울 속이 낯선 사람이 나타날까 두려웠던 거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거울 가까이 다가갔다. 참으로 기이하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거울 속에 아버지가 나타나시다니! 생전의 아버지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 나를 보자 딸내미가 초를 쳤다.
“아빠 머리 위에 비둘기가 앉았어.”
며느리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흰머리에 검은 머리가 섞인 걸 두고 나를 놀리는 소리였다. 젊어서는 흰머리가 탈이더니 이젠 검은 머리가 탈이다. 희거든 검지나 말지 이게 뭐야?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밀밭에 가라지(밀밭에 자라는 독초)가 자라자 종들이 주인에게 가서 말했다.

“주인님,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
주인이 말했다.
“가라지를 뽑다 밀까지 뽑을 수 있다. 그냥 두어라. 수확할 때 따로 골라 불에 태워 버릴 것이다.”
참으로 현명한 주인이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서라. 공짜로 뽑는다 해도 머리를 맡기나 봐라. 그마저 뽑아버리면 대머리가 되고 말게.’

그 후 어느 날 옛날의 그 친구를 또 만났다. 그 친구는 또 옛날처럼 안부를 묻기도 전에 다짜고짜 말했다.
“자네 신변에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일?”
“아니면 혹시 집안에?”
“에끼, 이 사람! 일이 있기를 바라나 보네.”
“짱배기에 된서리를 맞았군.”
폭삭 늙었다고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 말을 받아 나도 한마디 했다.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네.”

20201225_222444.jpg 질녀와 함께 저녁 홈트 후 질녀가 찍은 등판 반명함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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