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보니] 살갗아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 에세이

by 푸시퀸 이지

살갗 아래.

살도 아닌 것이 피부도 아닌 것이, 살갗 속도 아닌 것이 살갗 안도 아닌 것이, 심상찮다. 제목부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에 관한 에세이. 부제도 한몫 한다.


한때 '몸' 하면 패배자인 양 '몸부림' 치던 내가 몸을 부림으로써 아름다운 세상을 만나게 됐으니 책 표딱지에 걸려들지 않을 수 없다. 앉아 입던 바지를 서서 입고, 누군가가 끌어올리던 원피스 지퍼를 내 손으로 올리는 순간, 실로 몸은 아름다운 게구나, 를 느꼈던 나로선.


이 책은 열 다섯 명 작가가 몸을 구성하는 장기 하나씩을 맡아 써내려 갔다. 각 신체 부위를 고찰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인간성을 이해하려 했다. 의사나 과학자가 아닌, 창작의 길을 걷는 작가들이 몸을 어떻게 다룰까. 하도 궁금해 주민등록증을 외상 지며 도서관 대여에 성공해 완독했다.


피부, 폐, 맹장, 귀, 피, 담낭, 간, 창자, 코, 눈, 콩팥, 갑상샘, 대장, 뇌, 자궁이라는 열다섯 기관 하나하나에 해부학적, 생리학적 원리는 물론 에피소드와 철학적 고찰이 녹아 있다. 내 열 다섯 장기가 꿈틀대며 단숨에 읽었다. 박연준 시인이 사실을 넘은 진실 이야기, 전율이 느껴진 책이라는 평이 오버는 아니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기관 중 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듯, 열다섯 편 이야기 모두가 살갗에 닭살 돋게 했지만 가장 으뜸은 '대장'이었다. 안그래도 외모지상주의에, 가뜩이나 코로나19로 눈과 관련된 성형수술과 화장품 매출이 급증했다는 통계 자료까지 나오는 마당에, 살갗 저 아래 음지에서 일하는 '대장'에게 정이 간다.


달콤한 욕구로 시작하는 입과 달리 종착역에서 더러운 일도 마다않는 '대장', 쿵쾅쿵쾅 존재감 드러내는 심장과 달리 뒤에서 묵묵히 총정리 하는 대장을 난 좋아한다. 그런 '대장'을 작가 자신의 우여곡절 인생과 어우르니 당연하게 취급했던 미안함, 있어야 할 곳에 그대로 있어준 것의 감사함이 애달궜다. 의학 서적에서 보는 해부학적 도면을, 이야기로 X-ray 촬영한 것 같다.


윌리엄 파인스가 인공항문을 달며 지낸 일부를 옮겨본다. 그밖에 없어도 괜찮을까, 뗄라면 애초 왜 존재했지, 싶은 맹장, 담낭, 갑상샘의 압권 문장들도 옮겨 적고 싶지만 그걸 다 적다간 내 대장에 세로토닌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대장, Bowel


윌리엄 파인스(영국 소설가),

The Music Room(2009)과 서머싯몸상을 받은 The Snow Geese(2002)로 알려졌다. 19세에 크론병 진단을 받았다


- 가장 깊은 속내를 누구에게도 감출 수 없게 되었을 때 -



이 세상에는 반드시 무언가 잘못되어야만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자동차 팬벨트, 전기 가스 겸용 보일러, 그리고 대장이다. 나는 대장을 떠올리면서 배꼽 뒤에 있는 끈적끈적하고 뒤죽박죽 뒤섞인 무언가를 상상했다. 그런데 소화과 전문의들은 그곳으로 6미터나 되는 관을 밀어 넣는다. 양쪽 끝으로 뚫려 있는 내 입에서 항문까지 식도와 위, 작은창자, 회장, 결장, 직장으로 이루어졌고, 척수의 신경 세포보다 훨씬 더 많은 1억 개 신경 세포(뉴런)가 분포하고, 인체에서 분비하는 세로토닌의 95퍼센트를 생산하는 그 정교한 소화관으로 말이다. 나는 내 뱃속에서 가로로 누워 있는 결장 혹은 대장의 형태를 분명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위로 올라가다가 비장의 만곡부와 간의 만곡부에서 구부러지고 다시 내려가는 S자 형태의 결장은 거강할 때는 물, 침, 위산, 담즙, 이자액 같은 액체를 매일 10리터씩 흡수하는 영리한 주머니다. 하지만 어둡고 구불구불한 터널을 뚫고 들어가는 관 앞에 전조등이 달린 움직이는 작은 눈을 가진 대장 내시경이 찍어준 나의 것은 궤양과 염증과 흉터 조직이 가득한, 엉망으로 벌겋게 충혈된 생체 기관이었다(214~215P)


그 전까지는 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시하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지 미처 짐작도 하지 못했다. 나는 채 썬 양배추나 완두가 둥둥 떠 있는 이탈리안식 수프나 맑은 과일 주스 혹은 걸쭉한 오트밀 같은 유출물이 가득 든 주머니를 앞에 차고 다니는 느낌을 늘 느끼며 살아야 하고,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내 몸의 작용을 훔쳐볼 수 있는 창문을 가지게 되고, 밤새 내 몸에서 배출한 가스로 아침이면 체펠린 비행선(독일의 체펠린이 최초로 발명한 경식 비행선으로 비행선을 띄우는 부양용 가스주머니와 선체가 분리되어 있다)처럼 부풀어 올라 주머니의 이음새를 터질 것처럼 빵빵하게 만들고, 욕조에 들어가면 구명복을 입은 것처럼 내 엉덩이를 수면 위로 밀어 올리는 주머니를 들고 다녀야 하는, 그런 속사정 말이다(218P).


나는 가끔 거울 앞에 서서 내가 온종일 들고 다니는 오물 주머니, 내 옆구리에 붙어있는 분홍색 장이라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장식물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한다. 끔찍한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신이 그 사람의 수치를 주머니에 담아 배나 옆구리에 달고 다니게 하는 이야기를 생각해볼 때도 있다... 나에게 스토마와 스토마에 달린 부속품들은 '관능'의 반대말과 같았다. 내가 성생활을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방해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219-220P)


군중 속에서 나는 저들 중에도 나 같은 사람이 있는지, 멸균 가제를 붙이고 가스를 거르는 탄소 필터를 달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두 부분으로 나뉜 최신 보조 장치에 연결된 플라스틱 용기를 소지한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하면서 사람들 얼굴을 살펴본다. 설령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비밀 협회 회원들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살아가면서 절대로 한 번도 보지 못할 기관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다(220-2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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