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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시퀸 이지 Mar 21. 2022

가슴 활짝 고개 빳빳 쳐들게 한 폴댄스

“오금(무릎 뒤) 많이 아프신가요?”

“네. 살이 찢어질 것 같아요.”

“아, 네. 원래 아파요.”


“척추기립근(등)에 힘!”

“전완근(아래팔)에 힘!”

“자, 버티세요. 하나, 둘, 셋...”


폴댄스 현장의 소리다. 여기서도 버티는 인생인 건가. 체험 삶의 현장 같은 멘트들. 체험수업 땐 폴과 음악이 내 몸에 엉겨 감동 한 사발 들이켰다. 갈수록 폴, 몸, 곡이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폴댄스를 배운 후부터 옷은 피부 가리개가 되었다. 폴이 지나간 자리가 푸르딩딩, 울긋불긋, 세계지도이기 때문이다. 인도여자 복장 사리(Saree)라도 걸치고 출근하고 싶었다.


폴댄스 동작으로 입사면접을 봤더라면 난 단박에 탈락이다. 일단 폴에 매달리려면 무릎 사이나 허벅지 조이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힘을 다 준 게 의심들 정도로 줄줄줄 미끄러졌다. 또 무릎 오금이나 팔꿈치 안쪽을 접어 폴을 잡아먹듯이 물어줘야 하는데 팔다리를 기껏 접어도 90도다. 선생님 손까지 동원해 20~30도를 만들어 추락을 면했다.


손으로 폴 잡고 버틸 때는 한때 앙증맞아 귀엽다던 손이 밉상이었다. 폴 지름보다 유난히 작은 손이 무쇠팔을 무색하게 했다. 뒷목이나 등의 승모근으로 폴을 밀어붙이면 매달릴 기회는 또 있다. 닭 모가지 빼듯 폴 사이를 애써 들이밀어도 내 목덜미에선 차디찬 쇠붙이를 느낄 수 없었다.


발레리나처럼 손으로 발 잡는 동작은 더 가관. 폴을 사이에 두고 손으로 발을 잡아 우아하게 다리를 끌어올리는 모습, 은 구경만 했다. 난 공중에서 손을 파르르 떨며 내 다리 찾아 삼만리로 휘젓느라 바빴다. 양다리를 뻗는 동작(스플릿)에서 숨은 그림을 찾으라면 다른 사람은 ‘1’, 난 'W'를 찾으면 되었다. 남들은 무릎의 존재감 없이 두 다리가 일자지만 난 노안도 찾아낼 수 무릎으로 꺾은선 그래프였다. 동작을 이해하고 버티는 것도 시원찮은데 모양까지 이 모양이다.


척추관협착증 환자인 내가 다리를 찢고, 허리가 뒤로 꺾이는 ‘후굴’ 동작을 해도 되는 건가. 가뜩이나 안 되는 동작에 불안감이 더해져 근육과 마음은 더 위축했다. 유연하지 않은 몸을 펴고 당기느라 힘을 다 써버려 실패한 동작을 다시 해 볼 체력도 남아나질 않았다. 유연성을 먹고 들어가는 사람은 반복 연습은 물론 아는 걸 총망라해 작품까지 만든다.


설상가상에 엎친 데 덮친, 부익부빈익빈이로다. 내 피부는 ‘건조주의보’라고 불릴 정도로 각질과 건조의 대명사다. 손에 그립젤이라는 하얀 겔을 바르지만 쇠붙이 폴에 붙어 있으려면 살과 맞닿은 마찰력이 커야 한다. 제아무리 피부에 끈적끈적한 알로에를 바르고 수분(그립) 미스트를 덕지덕지 뿌려도 폴 미끄럼틀 타며 바닥으로 착지. 안됐다는 표정으로 선생님들은 '실력이 아닌 피부'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고보니 체험수업을 땀 나는 계절에 했구만. 나에게 맞지 않는 운동임에 틀림없어!


주말에 집 근처 폴댄스 학원을 다녔다. 강사고 회원이고 대부분 20대다. 대학생들도 많아 탈의실에서는 귀동냥으로 덩달아 대딩 된다. 2배 넘는 내 나이가 ‘열정’의 배수인지 ‘주책’의 배수인지, 1년이 지나도록 실력은 고만고만, 배수진을 쳐야 하나. 배우는 동작마다 실패를 거듭하고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 2-3개월 배운 친구들만도 못하니 때려치워야 하나. 꽃다운 그녀들은 평일과 주말로 2-3개월, 그것도 먹고 들어가는 유연성에 나이까지 한 몫. 난 꼴랑 주말 수업만 왔다갔다, 어쩌다 마주친 폴, 로 닿으면 더 아프고 더 멍들고 더 피하고 싶었다.


이성은 '맞지 않는 관계'라 해도 감성은 딴생각이다. ‘아까 그 동작에서 몸을 좀 더 비틀면 됐을까? 허벅지를 더 조였으면? 손을 더 안쪽 잡았다면?’ 꼬리 물은 생각이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폴과 애증(愛憎) 관계인지 나만의 짝사랑인지. 씹는 이가 없다고 난 안 돼 소리만 했지, 잇몸 찾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잇몸으로 씹어보자. 후굴은 가슴과 등 근육이 힘을 합쳐 뒤로 제치고 스플릿은 등, 가슴, 하체 근육으로 뻗으면 될 것이다. "난 안돼"가 아니라 "지금 안돼"일지어니 폴 사랑을 쟁취해 보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폴 없다.


사랑은 강도 아닌 빈도, 맞다. 폴과의 만남을 늘리기 위해 회사동네 원주를 물색했다. 폴댄스 학원이 사택에서 버스로 19개 정류장이지만 재고 자시고가 없다. 그대를 위해 내가 가리. 밤마다 다리 찢기 연습을 했다. 가로 세로 열십자로. 후굴을 향하여 양손 양발 바닥에 대고 동대문처럼 몸을 들어올리는 짓도 했다. 뜨뜨미지근하게 1년도 보냈는데 1년 더 못 찢으랴. 입 째지게 다리까지 찢어지니 폴과의 첫경험 감정이 되돌아왔다. 폴, 몸, 곡(음악)의 하모니.


내 시대만 알 법한 TV만화 <달려라 하니>에서 하니는 엄마 찬스를 썼다. 엄마를 생각해 달렸던 하니. 난 아들 찬스를 써서 ‘매달려라 이지’를 연출했다. 아들이 연주한 드럼 곡으로 폴댄스 작품 시험을 봐 2급 지도사 자격증까지 땄다. 1분 동안 폴에 매달려도 숨이 차오르던 내가 무려 3분3초 동안 폴과 하나 된 것이다. 원주 폴댄스 단장님과 퇴근 후 밤 9시에 하나가 되었기에 가능했다. 오히려 20대였다면 이 모든 건 불가능했다. 엄마 찬스를 쓸 수 없는 비용이기에. 이 나이에 폴댄스 배운 게 딱이다.


졸지에 ‘척추기립근’이 가장 좋아하는 근육이 되었다. 이름도 얼마나 멋진가. 척추도 세우고 나도 일으켜 세운 기립근. 나 자신에게도 기립박수. 폴댄스를 하면서 몸치장에 관심이 없어졌다. 동작마다의 기능이 중요하지 몸치장은 겉치레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폴댄스 복장은 물 속은 아니지만 폴과의 마찰력으로 수영복 차림이다. 후줄근한 추리닝을 걸쳐도 역할 수행자로서의 몸만 보인다. 학원비는 가뭄에 콩 나는 화장과 쇼핑으로 퉁 친다. 시원찮은 몸은 근력, 유연성, 체력으로 보상되니 돈과 몸을 교환할 가치는 실로 다분하다.


노동 같은 운동이 아닌 설렘 주는 스포츠 하나 챙겨두는 건 어떨까. 하고싶은 모션을 위한 운동은 더이상 노동이 아니다. 내 몸이 허락하고 나를 표현하는 움직임이라면 정 붙일 만하다. 맨몸도 좋고 폴과 같은 도구와 함께라도 좋다. 나이 들수록 근육도 줄어 어차피 움직여야 한다면 나만의 낚시밥, 미끼로 코 끼는 운동이면 좋겠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끌고 날 들어 올려 고개 빳빳이 쳐들게 한 폴에 아직 설렌다. 쉰 넘어 100세까지 연애하려면 마음 보단 힘 단속, 관절 단속이 필요하겠다.


어릴 적 한창 고무줄놀이 할 때 부르던 노랫말, “탄다 탄다 밥 탄다”

기분 울적하거나 외로울 때 부르는 노랫말, “탄다 탄다 폴 탄다”  


가슴이 열리니 고개를 들게 되고 고개를 드니 시선이 바뀐다.

더 멀리 더 높게. 나도 이제 봉(폴) 잡았다.


고딩 아들 드럼 연주곡에 맞춘 애미 폴댄스 작품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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