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132) 자화상

겨울눈

by 이주형

자화상

- 겨울눈 -


지고 나서야 알겠더라

지난 시간의 의미를

그 시간을 함께한

사람의 의미를

그들과 함께 지은

공간의 의미를


무너지고야 알겠더라

아무리 기를 쓰고 애를 써도

무너질 것은 반드시

무너져야 한다는 걸

그것 또한 얼마나

부질없다는 걸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만든 것은 모두

무너진다는 걸

세상 제일 부질없는 건

말로 지은 사람 관계라는 걸


모두 떠난 뒤에서야 알겠더라

인연만큼 허무한 것도 없음을

악연만큼 질긴 것도 없음을

악연과 인연은 순서를

바꿀 수 없음을

우리가 사는 시간은 아등바등

그 모진 연을 짓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무연으로 돌아가지 않는

시간은 없음을

그 무연의 끝은

자연이라는


바람조차 빈 봄날

나뭇가지에서

의무감을 지운 겨울눈과

마주한 그 빈 봄날


보았


시간 아래로

가라앉지 않으려고

허덕대며 끊길 듯 말 듯 한

숨 길을 찾는

마음 빈 사내와

그의 빈 마음에 겨울눈을 틔우려

숨 넘어가는 두 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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