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가 따라 아팠다.
새벽공기가 조금 선선해진 듯하다. 중앙차로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에 서서 반대편 공사 중인 건물을 멍하니 쳐다본다.
‘ 연휴에도 일을 하셨나! 건물이 더 올라간 거 같은데!’
‘ 철근 작업은 안 하나보다. 저 옆길로 가도 되겠네’
‘ 파란불이다! 저 사람은 매번 이 시간에 반대편서 건너네. ’
‘ 저 건물주도 참 짜증 나겠다. 저렇게 저기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붙이고 난리 치는데도 어쩜 저렇게 저 자리로 모여들어 담배를 피우지? 신기하네. 미지정 장소를 지정처럼 쓰는 이런 현상은 뭘까?’
‘ 사거리네. 왼쪽으로 가서 편의점서 감동란이라도 사갈까? 에이 귀찮아. 그냥 직진하자’
‘ 이 비싼 아파트 경비 아저씨들은 참 부지런하시네. 아침부터 화단에 물주시느라 힘드시겠다’
‘ 어라? 여기 가게 공사 중이더니 국수집이 생겼네! 오픈 기간에는 사람이 많을 테니 나중 잠잠해지면 한번 와봐야겠네. 직접 면 뽑나?’
‘ 여기 사거리는 차들이 좀 멋대로 지. 좌우하상! 하상은 뭐야. 새싹이가 합기도서 기합 매번 넣더니 나도 입에 붙었네. 땅이랑 하늘은 왜 보냐, 차 오는지 잘 봐야지’
‘ 그나저나, 새싹이는 오늘 괜찮으려나. 이모님이 병원을 잘 데려가주시겠지. 톡으로 상세히 잘 적어드렸으니 의사 선생님에게 잘 설명하시겠지? 해열제 바꿔달라고 해야 하는데. 덱시부펜 계열 아닌 이부펜 계열이 잘 듣는데 ‘
‘ 아침도 못 먹었는데 커피라도 한잔 사가자, 지하 매장은 또 시간 걸리니까 여기 가야겠다. ’
“ 따뜻한 아메리카노 주세요! ”
‘여기 사장님이 바뀐 건가! 늘 냉랭하셨는데 최근에 계신 분은 너무 친절하시네’
‘ 회사가 다와 가네. 오늘 오전 중 끝내야 하는 게 뭐더라. 아, 그것부터 보고 드려야겠다’
아~~~!
(길진 않게 목에서 터져 나온 비명소리. 입 밖으로 나오기전 이미 목에서 혈관 터지듯 뿜어져 나온 소리다!)
가방 속 물건들이 순대 속 터지듯 터져 나와 공중에 떴다. 왼손에 든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순간 기우뚱하더니 내용물을 리드 위로 조금 토해 놓고는 멀쩡히 내 손에 잡혀 있다. 커피는 지켜냈으나 내 발목은 지켜내지 못했다.(커피를 버리고 다른 방어 행위를 했다 해도 달라진 건 없었을 것이다.)
신기한 건 이 모든 순간이 슬로모션 같았다는 거다. 영화, 드라마에서 보면 이런 상황에 슬로로 걸면서 커피 뚜껑이 열려 공중에 흩뿌려지고 사람이 서서히 넘어지는 장면을 보여주지. 아마 나는 나의 모습을 그 슬로모션으로 순간순간 찍고 있었다. 왼쪽 복숭아뼈가 땅에 부딪치는 느낌인가! 왼쪽 발 가장자리가 땅에 쓸리는 느낌인가! 뭔가 큰 느낌 2개가 지나가고 나는 쓰러지지는 않고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아 섰다.
온몸에 모공이 다 열린 것이 느껴진다. 싸한 알코올솜이 스치고 지난 간 느낌이다. 땀이 쫙 나는 듯하다가 순식간에 땀이 식으며 앞이 몽롱해지더니 2차 휘청. (이런 게 기절한다는 느낌인건가!) 그럼에도 다시 한번 중심 잡고 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보는 이가 있는지 살피고(다행인지 아닌지 있다고 해도 나에게는 관심 없는 듯하다.) 잠시 몸을 기댈 수 있는 지형물이 있는지 살폈으나 딱히 없다. 그 순간 고통이 엄습해 온다.
“ 아프다 이 씨……”
땅에 발을 디뎠더니 걸을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이건 늘 접질리던 수준이 아니구나! ' 난감하다.
그래도 일단 사무실에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고통을 참으며 그 머나먼 길을 간다. 걸음마다 혼잣말 신음소리를 내뱉는데 이거라도 안 하면 못 걸을 것 같다. 어렵게 앉은 사무실 의자. 조심스레 발을 살펴본다. 벌써 멍이 오르고 복숭아뼈 근처로 부어오름이 보인다. 급히 얼음을 뽑아서 응급 처치를 해보지만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건 병원에 가야 함을 안다.
‘ 연휴 끝나고 첫날인데 출근하자마자 병원 간다고 자리 비우면 무지하게 욕할 텐데 ‘
회사원의 비애지만 답이 없다. 병원까지 갈 일도 걱정이다. 가장 가까운 정형외과를 검색해도 300미터는 족히 떨어져 있다. 말이 300미터이지 10분은 걸어야 하는데 이 다리로는……
주변을 두리번거려 본다. 미안하지만 병원까지 부축해 줄 수 있는 동료가 있을까?
- 남자 직원은 불가하다(동네 입방아 감이다)
- 친한 동년배 동기는?(하필 죄다 연휴 붙여 휴가 중으로 확인됨)
- 여자 후배들은?(블라인드에 올라가는 거 아닐까?) 조심스럽다.
여러 고민하다가 결국 어린 후배지만 결혼도 해서 유부 클럽 내 있는 동료에게 멋쩍게 부탁해 본다. 다행히 흔쾌히 나서주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다.(참고로 난 남에게 부탁하거나, 불편한 상황을 주는 것을 의식적으로 아주 피하는 사람이다.) 병원 앞에서 고마운 그녀를 돌려보내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병원에 도착하니 간호사분이 친절하게 맞아주신다. 이것만 해도 마음이 놓인다. 반대의 경우라면 신경전까지 추가해야 해서 머리가 아팠을 텐데(무조건 의사, 간호가가 친절해달라는 건 아니지만 눈도 안 맞추고 방문한 자체가 불편하다는 기색으로 던지는 날 선 말투. 아파서 찾은 병원에서 비수 하나씩 꽂고 나오는 경우 많지 않은가. 그럼에도 주변에 선택 가능한 병원이 없다면 알면서도 또 가야 하는.) 말랑해진 마음으로 진료 시작.
엑스레이부터 초음파까지!
“ 엑스레이상에는 뼈의 골절은 없습니다. 초음파 보시면 이런, 두 곳을 크게 다치셨네요. 여기가 인대입니다. 까맣게 된 부분 보이시죠? 인대가 끊어지거나 파열된 부분이 이렇게 보입니다. 이런 부분이 크게 2곳 있고 작게 작게 몇 곳 보이네요. 이 상태면 깁스를 하셔야 합니다.”
조곤조곤, 부드럽고 나지막하게, 이해 잘되게 꼼꼼하게 사진 설명을 해주신다. 많이 아팠겠다는 F형 공감에 마음이 좀 안심이 된다. 간호사 선생님이 또 친절하게 붕대 감고 하나하나 설명하시는데 이렇게 웃으며 이야기하시는 간호사분을 얼마 만에 본 건지!
아파도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병원에서는 자연스럽게 실손 보험 청구용 서류들을 떼어주신다.
ㄴS9349 : 발목의 상세불명 부분 염좌 및 긴장
초음파 보실 때는 파열, 절단등 무서운 단어로 표현하셨는데 실 진료확인서에 적힌 코드는 완화된 병명인가? 뭐 정확히 어떤지 모르겠는데 일단 뭐 아프단다. 한동안 사용하지 말라시고, 최소 2주 이상 깁스 유지는 필요하다시네.
‘아하, 어찌할꼬. 출, 퇴근은’
아이언맨처럼 한쪽 다리 무장하고 도로로 나섰다. 다치지 않은 다리로 힘이 쏠려 이 다리도 곧 지칠 거란 게 예상된다.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총총거리듯 짧은 간격으로 걷는다. 날씨도 더워서 땀이 쏟아져내린다. 그래도 한국사람들은 아픈 이에 대한 배려가 기본적으로 있다.(단, 본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전제하) 지나가는 길을 터주기도 하고, 육교 엘리베이터도 잡고 기다려주시네. 그렇게 긴긴 거리를 뚫고 사무실로 들어서자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하다.
“아.. 네.. 뭐… 넘어졌네요. 좀 많이 다쳤나 봐요”
위로할 말을 찾은 이들에게 우선 말을 건네고 앉았다.
나에게는 숙제가 하나 더 있다. 우리 새싹이. 휴대폰을 열어 톡을 보니
- 백혈구 수치, 염증 수치 검사 결과 기다리고 있어요. 수액 맞으며 애는 자고 있고요. 혹 결과가 높게 나오면 입원해야 한다네요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살고, 살아내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된다 ‘
몸 안으로 소리, 비명을 질러 댄다. 그러다 헛웃음만 나온다. 큰 남자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아이가 입원하게 되면 재택을 하겠다고 팀장에게 말했다는 답이 온다.
(문제 해결을 우선적으로 하는 전형적 남자 프로세스인데.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모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 다행히 염증 수치가 저번보다 반으로 줄어서 입원은 안 해도 된다네요. 수액 맞고 약도 좀 바꾸고 하면 될 거라네요. 걱정 마세요”
다행이다. 그래 나에게 그러면 안 되지. 안되고 말고.
이제는 온전히 내 문제만 남았다.
나는 어찌할 것인가!
다친 건 난데 내가 쉬겠다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입장이란 사실이 슬프다. 아프다고, 쉬겠다고, 재택 하겠다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물론 승인자는 거절할 수 없으시겠지만 마음속에는 불만이 싹트시겠지. 그게 보이는 20년 차 회사원이다.
나와 아이 사이에서 고민할 큰 남자에게 최대한 빨리 아이에게 가주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린다. 택시를 타고 오라는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알지만 이 시간에 그 거리를 택시라니! 말도 안 돼!
꾸역꾸역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그 수많은 걱정과 쓸데없는 참견 같은 중얼거림으로 출근했던 길인데. 지금은 그냥 땅만 보고 걷는다.
‘ 새싹이 가 좌우하상!이라고 했지. 그래 그 말이 맞았네. 땅도 봤어야 했어. 선견지명이 있었군.
이제와 땅보고 걸으면 머 하누’
자책도 하면서 그 길을 걷고 또 걷는다. 정말 긴 하루였다. 집에 도착하면 포근한 침대에 넘어지고 싶다. 하루종일 중심 잡느라 고생한 나에게 이제는 됐다고. 이제는 그냥 놔줘도 된다고, 쉴 시간을 줘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