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토비 친구
보라돌이=Y.J(me)
뚜비=M.K
뽀=M.S
우리는 나나가 없는 텔리토비 친구다.
《꼬꼬마 텔레토비》(Teletubbies)는 1997년 3월 31일부터 방송 중인 BBC에서 만든 어린이용 TV 시리즈다. 국내에선 1998년 10월 12일 KBS 2 TV를 통해 꼬꼬마 텔레토비라는 한국판으로 2005년 4월 29일까지 방송되었다
텔레토비라고 자처하게 된 계기는 사실 별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20년을 훌쩍 넘게 친구로 지내오면서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자연스레 수긍한 부분이다. 나름의 캐릭터 특징이 너와 같고 나와 같고 우리와 같다는 생각.
1. 뚜비=M.K
나의 뚜비는 고목 같은 사람이다. 이런 표현에 발끈할 네가 눈에 선하다. 그래도 넌 우리의 반짝이는 초록 하늘이고, 시원한 그늘이고, 변하지 않는 쉼터다.
우리 중에 가장 어른스러웠고, 현실적이었고, 그럼에도 가장 꿈이 많았다. 늘 여행을 다니고 새로운 경험을 즐거워했다. 그렇다고 경험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흩뿌리거나 애써 수다스럽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실 딱히 우리도 집착하며 질문해 대는 일은 별로 없었다. 굳이 질문을 던지는 날은 뚜비 프로필이 바뀔 때?
“여긴 어디야? 좋아?”
묻고, 간단한 답을 받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난 그런 뚜비가 멋있었다. 특별한 일에 그냥 그런 대수롭지 않음이 괜히 더 어른 같아 보였다곤 할까!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공부하고, 일을 하게 되면서 모든 생활을 공유할 만큼 생활 밀착형 우정 쌓기를 하진 못했다. 여느 드라마 속 친구들처럼 하루 일과 끝나면 모여 앉아 술 한잔 마시는 추억 따위도 딱히 없다. 각자에게 숨 막히게 흘러가는 20대는 그렇게 거의 비대면으로 서로를 응원하며 지냈다. 그래도 잊지 않고 자주 연락하고 큰일이 생길 때면 언제든 서로에게 달려갔다.
가끔 아무 일도 없는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시시한 에피소드도 단톡방에 올려 수다를 시작하다가 결국은 서로의 안녕을 챙기며 다음 에피소드를 기다리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끝난다. 그 흔한 '안녕, 또 연락할게' 등의 인사말도 없이. 그러다가 재밌는 물건을 볼 때나 뭉클한 책을 만날 때도 우리는 또 우리를 떠올린다. 멈춰진 톡방에 다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진 한 장, 문장 한 장 투척해 두고 말이다. 그 사이 간격이 얼마가 되었건 어제처럼 또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그런 우리의 자연스러움이 좋았다. 모두가 그렇게 서로를 배려하고 있음을 아니까.
수다스럽지 않은 나의 뚜비는 삶에서 내가 가장 힘들거나 외로운 순간에 여행 오듯 나를 찾아줬다. 애써 아프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문자에 던져지는 뉘앙스로 내가 아픈지 알아챘다.
“보라돌이! 이번 주말에 뭐 해? 나 서울 가니까 그때 보자”
그러고 올라와서는 서울에 살고 있는 나보다 더 오래 산 사람처럼 나를 데리고 다닌다. 공연도 예약해 놓고 맛있는 음식점도 알아두고, 미술 전시 일정도 다 꿰고 있다.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딱히 또 뭘 묻는 건 없다. 그렇게 딴생각 못하게 혼을 빼두고는 쿨하게 돌아간다. 그러고 며칠 동안 나는 뚜비의 흔적들을 집안 곳곳에서 마주하게 된다!
‘ 이 책 재밌더라. 한번 읽어봐!’
‘ 이거 맛있더라. 상하기 전에 다 먹어라’
‘ 욕실에 있는 거 내가 다 치워 놨다. 신경 쓰지 마’
‘ 심심하면 아무 때나 전화해라’......
이밖에 집안 곳곳에 포스트잍이 붙어 있다. 처음에는 이게 뭐야 하다가 나름 찾는 재미가 있어 즐거웠다. 나를 위한 생색 없는 배려였으리라. 나중에 뽀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뽀 역시 힘든 시기에 뚜비가 밀착케어로 함께 해 주었다고 한다. 세상 살아가면서 힘든 일 하나 없을 수는 없겠지. 그래도 혼자라고 생각이 안 들면 그래도 견딜만한 것 같다. 타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야 없겠지만 그냥 그렇게 곁에 있어주는 힘. 그게 뭔지 뚜비는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뚜비 역시 마냥 편한 인생은 아닌데, 입 밖으로 힘들다고 내뱉는 일은 많지 않다. 그래도 나도 이제는 그녀의 10대, 20대, 30대 그리고 이제 40대를 지켜보면서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 같다. 고단한 마음도, 상처에 무던한 듯 넘기려는 마음도, 가끔 찾아드는 외로움을 잘 접어서 정리해 두는 마음도.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너에 마음 여기저기에 포스트잍을 몰래 붙여 두고 싶다. 그리고 어느 어떤 날 툭하고 너에게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난 너에게 서프라이즈 같은 친구가 되고 싶다. 70에도, 80에도.
(그때도 난 계속 예쁠 예정이야. 욕 금지!!)
나보다 항상 먼저 더 어른이 되는 뚜비와 오늘은 갤러리들이나 돌며 하루 종일 걷고 또 걷고 싶다.
뚜비야 오늘 뭐 하니?
2. 뽀=M.S
나의 뽀! 반전의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내 친구.
17살의 너는 얄개란 옛말을 꺼내야 할 아이지. 지금은 어쩌면 죽은 말이 된 단어까지 굳이 끄집어내는 것은 왠지 그 시절의 너에게는 그 말을 대신할 말을 아직 못 찾아서야.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사실 기억이 잘 나진 않아. 그냥 어느 순간부터인가 니 옆에 내가 있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어. 고교 생활로 거슬러가봐도 떠오르는 장면들에는 항상 니가 함께해. 생긴 것도, 생각하는 것도, 성격도 너무 다른 우리였는데 나는 왜 널 좋아했을까?
항상 상념에 젖어 있는 나와 달리 넌 늘 장난스러움으로 무장해서 나를 웃겨줬었지. 나뿐만 아니라 니 주위 사람들은 너로 인해 많이들 즐겁고 재미있어했어. 딱히 개그스러움을 보이겠다고 나서는 것은 또 아니지만 뽀가 사용하는 언어, 이야기, 말투, 표정들은 늘 살아 있었던 것 같다. 그 밝음에 이끌리듯 다가갔고, 그렇게 뽀의 밝음을 나누어 쬐었던 나의 시절이 있었어.
어쩌다 보니 대학도 같이 가게 되고, 자취도 둘이 같이 하게 되면서 10대의 너와 또 다른 모습들은 더 알게 되었지. 아무리 친한 친구들도 같이 붙어살면 싸우고, 원수같이 헤어진다고들 하는데 다행히 우리는 잘 붙어있다가 뽀의 동생이 같은 대학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졌어. 이 시기에 우리가 배운 건 타인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둘이 아닌 각자의 교우관계, 사회관계들을 확장해 나가면서 비슷하던 삶의 패턴들이 갈라지기 시작했지만, 이 부분은 나름 잘 적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삶의 방식을 터치하지 않았다.
분명 한 지붕아래서 서로에게 화가 나는 일이 생겼을 텐데, 우리는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TV장 앞에 짧은 편지나 메모로 가끔 마음을 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그것도 엄청난 배려가 가득한 문장들로 덮고 서운함은 조금 깔아 두는 정도? 그래도 다행인 것이 서로는 그 숨은 문장을 잘 찾아냈고, 나름 일상에 그 배려를 녹여서 답장하곤 했다. 지금은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냥 그 배려하던 마음만 곤히 남았다.
젊고 유쾌한 부모님과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그저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로만 뽀를 봤었다. 뽀와 달리 우리 집의 가정교육 방향은 최소한의 양육, 스스로의 선택, 선택에 대한 결과도 스스로 책임이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뭐든 내가 해야 한다는 게 뿌리 깊이 박혀 있어서,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거나 의지 하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이런 나에게 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뭔가를 잘 챙겨줘야 할 것 같고, 책임져야 할 것 같은 마음을 들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어린 동생 같다 여겼나 보다.
'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지, 수업은 잘 갔는지, 반찬 해둔 것은 잘 꺼내먹었는지, 라면 대충 먹고 나간 건 아닌지, 시험은 잘 봤는지, 과제는 잘 냈는지, 작업실에서 잠은 좀 잤는지, 술 마시고 집에는 잘 오는지. 밤길 위험한데......'
그런데 뽀가 나보다 더 의지가 강하고, 실천력도 강하고, 두려움 없는 도전쟁이였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다. 어느 날 뽀는 선택한 과가 자신과 맞지 않아서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맘때 젊은이 반정도는 저런 생각을 하다 지나갈 거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었다. 저러다 말겠지 했고. 그리고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뽀는 영어를 가르치고 싶다 말했다. 학기 중에 영어 학원을 다니더니, 점차적으로 티칭 하는 코스로 넘어가고 있었다. 결국 졸업할 무렵에는 학원 강사님이 되어 있었다. 이 멋진 녀석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런 뽀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기우가 참 가여워져 버렸다. 넌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되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나만 너를 10대로 묶어두었구나! 싶은 마음에 나 역시도 조금 조바심이 났던 것 같다.
'내가 가는 길은 맞는 길인가?'.
뒤돌아 보면 그때 너는 나에게 칭찬을 참 많이 해줬다.
"보라돌이! "
- 너 왜 이렇게 음식을 잘해? 이 콩나물 무침 진짜 맛있다. 어떻게 하는 거야?
- 넌 어떻게 그렇게 결석 한번 안 하고 수업에 들어가니? 대단하다.
- 넌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사니? 멋지다
- 넌 어쩜 그렇게 알아서 척척 다하니? 부럽다!......
더 많은 말들이 있었을 것이다. 엄청 대단한 일들이 아니었음에도 뽀는 자주 그리고 진심 어린 말로 나의 행동, 모습들을 칭찬해 주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나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이구나를 느꼈던 것 같다.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자존감을 쌓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무리 열심히 잘 해내도 칭찬에 인색한 사람들만 내 주위에 가득해서 이런 훈훈한 상황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에피소드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나에게 그 감사한 것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 뽀다.
(이건 번외지만 덕분에 나는 지금 감사한 것에 감사하다고 열심히 표현하는 사람이 되었고, 누군가의 노력이나 배려에 칭찬을 주저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단다.)
나는 4학년이 되자마자 취업을 했고, 뽀는 원하는 공부와 일을 하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모두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는 뽀의 모습을 보면서 '애가 애를 키우네' 라며 어쭙잖은 걱정을 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역시 너는 또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너무나 안정되고 근사한 가정을 꾸리고 너처럼 사랑 많은 아이들로 성장시켰더라.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계속 배움에서 떠나지 않게 잘 붙들고 있는 너의 40대는 참 아름답더라.
많은 책을 읽고,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하고, 오프라인/온라인 할 것 없이 배우고 싶은 수업은 찾아 듣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전히 도전하는 모습에 늘 놀라울 뿐이었어. 그냥 어제와 같이 오늘을 열심히만 살아가는 내가 널 만나거나 이야기 오래 나누고 올 때면 심장이 쿵쾅거린다는 걸 넌 아는지.
" 보라돌이! 넌 잘하는 게 많잖아.
그리고 좋아하는 일도 있잖아. 꼭 글을 써봐!"
또 그렇게 깊이 숨은 나를 꺼내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너.
가끔 본인이 읽은 책중에 너무 우리와 나누고프다며 책 선물을 보내는 뽀. 보내는 너의 마음도 즐겁겠지만 받는 설렘도 무시 못한다. 며칠을 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가끔 방향 잃은 우리에게 나침반 같은 선물을 전하고서는 천진하게 웃는 너라니!
삶의 가치관을 확고히 세우고, 배우고, 깨우친 것에 대해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는 나와 뚜비에게 단단한 어조로 이야기할 때면 난 너를 칭찬해주고 싶다.
' 뽀! 너는 너의 40대 모습을 너무 아름답게 잘 채웠구나!
너의 50, 60이 기대된다!'
3. 텔레토비 친구들
나이가 든 자신의 모습은 결국 지난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결국 자신이 만든 모습이라고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뽀와 뚜비, 그리고 나도 덤으로 아름다운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의 반 이상 친구로 만나오고 앞으로 얼마의 인생을 또 같이 할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겹겹이 쌓아온 추억과 수 없이 나누어 담은 서로의 아픔, 간절하게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 재촉하지 않는 당연한 믿음. 그것으로 오늘, 내일, 또 어떤 날들을 보듬고 웃고 있을 우리다.
전국 각지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는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모여서 여행을 떠난다. 안산, 경주, 부산, 제주......
40살에는 꼭 유럽 여행을 가자고 했는데 코로나19로 무산되어 버렸다. 이제는 또 기대를 한번 해보고 있는데, 생각만 해도 설레고 좋다! 또 얼마나 재미있고 흥분되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수다를 떨게 될지.
오늘따라 우리 텔레토비들이 유난히 보고 싶다. 뚜비야! 뽀야 같이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