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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Feb 06. 2024

표현에 서툰 아이와 어른이 만났다

"내 마음은 내가 제일 잘 알지"

아이가 화를 내면 나도 화를 낸다. 때에 따라 달래주거나 심호흡하는 과정이 추가되긴 하지만, 결국 대부분은 나의 화로 끝이 난다. 그리고 아이가 수그러들면, 이내 나는 미안해진다. 나의 반성은 잠든 아이를 바라볼 때 절정에 다다른다. 곤히 자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나는 왜 좀 더 어른스럽지 못했을까 내일은 잘해줘야지 거듭 다짐한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나의 다짐이 무색하게 다시 아웅다웅이 시작된다. 이러길 벌써 5년째.


오늘도 아이가 짜증을 내다가 분에 못 이겨 울음을 터뜨렸다.

어제도 한바탕 전쟁을 치렀던 나는 아이의 화를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다.


"그만 울어 그거 울 일 아니야"

그런다고 그치면 그게 6살인가. 돌이켜보니 참 쓸데없는 말이었다.


역시나 아이는 더 큰 소리로 자신의 억울함을 표출했다.

"울 일이야! 내 마음은 내가 제일 잘 알지!"

더 어릴 땐,  바닥에 드러눕기도 많이 했었구나. 그래도 많이 성숙해졌네.




우리 집 6살은 자신의 마음은 자신이 제일 잘 안다며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표현 방식은 서툴지만 본인의 마음을 잘 알고 있고 자신 있게 표현하려 한다. 반면 39살인 내 마음을 모를 때가 많다. 그리고 잘 알아도 이런저런 이유로 '굳이' 표현을 안 할 때도 많다. '표현 방법'에 서툴지만 열심히 시도하는 6살과, 표현 방법은 알지만 '시도'를 안 하는 39살이 함께하면 어떨까.


"엄마가 연호가 왜 우는지 왜 신경질을 내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엄마는 그 능력이 부족한 것 같아. 연호의 마음을 자꾸 몰라주는 것 같네" 아이의 잘못 보단 내가 부족하다고 말해서 그런가, 아이가 조금 집중하는 같았다.


"연호가 연호의 마음을 좀 더 자세히 말해주면 어떨까?"

"말했잖아 으아앙!!!!"

( 네가 언제 말했어, 울고 소리만 질렀지>0 < )


"음, 연호 왜 울었어?" 여기선 '최대한 부드럽고도 다정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했다.

"짜증 났어!!!!!"

"연호가 짜증이 났었구나. 그래 연호야, 그렇게 연호의 마음을 먼저 이야기하는 거야. 그래야 엄마가 알지"

 

리학자 매튜리버만도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정화할 수 있다고 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라니, 솔직히 무슨 소린가 했는데 한 템포 진정하는 계기가 된다. 보통 짜증이 나면, 예민해지거나 말 그대로 짜증을 낸다. 그런데 '짜증이 난다'라고 말을 시작하니, 짜증을 내는 '행동' 대신 내 감정을 '설명'하는 걸로 이어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하다.


"어떤 게 짜증 났어?"

"개비하우스 더 보고 싶은데 유치원에 가야 돼서 못 보잖아!"

"개비하우스를 많이 보고 싶었구나. 그런데 연호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봐서 아쉬웠어?."

"응!!!! 엄청 기대했단 말이야"

"연호는 그럼 아쉬운 마음이었나 봐"


김영하 작가가 말했다. 우리가 표현하는 '짜증'이라는 감정에는 사실 다양한 감정이 뭉뚱그려져 있다고. 예를 들어 소중한 사람이 기념일을 잊어버렸을 짜증도 나지만 서운함도 함께 있다. 화장실에 휴지가 없을 때 짜증도 있지만, 당황스러움도 함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걸 '짜증'으로 표현해 버린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건 중요하지만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게 중요했다.


"엄마도 재밌는 거 보다가 꺼야 할 땐 너무 아쉽더라고. 하지만 우리 유치원 시간은 지켜야 하니까, 그럼 개비하우스 노래 들으면서 가면 어떨까? 그리고 갔다 와서 잊지 말고 바로 보는 거야!"


"그럼 대신 이 노래로 들을 거야 많이 들을 거야"

삐쭉거리긴 하지만, 많이 풀렸네. 오예 성공이다.

  

나도 어릴 땐 표현이 서툴지언정 자신 있게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연호처럼. 하지만 열심히 표현한다고 다 통하진 않았겠지. 소리 내어 울었지만 "울지 마 울 일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던 아이처럼 말이다. 상처로 또 실망으로 돌아오는 것이 반복되며 표현을 주저했겠지. 내가 변한 건지 몰랐다. 그냥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다 내 뜻대로 될 수는 없으니. 나랑 안 맞는 사람들도 많으니. 사회생활은 원래 참으면서 하는 것이니. 중요한 건 말을 안 한다고 내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 어떻게든 티는 났을 텐데.


물론 제대로 말한다고 다 통하진 않겠지만 조금 더 통했을지 모른다. 제대로 된 방법을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마음이 지쳤다는 사실이 새삼 아쉬워진다. 시도조차 안 했으니 확인할 길이 없었다.


우리 아이는 마음을 현명하게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커가면서 숱한 실패와 상처를 경험하겠지만 시도할 에너지는 끝까지 남겨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말해봤자야' 대신 '말하면 돼'를 더 많이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다시 열심히 표현해 봐야겠다. 세상만의, 그리고 상대방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무엇보다 이제는 옛날만큼 서툴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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