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딸아이는 유난히 말을 잘하고 노래도 곧잘 하고 그림도 제법 잘 그린다.
교회에 가면 율동도 똑부러지게 잘 따라하고 한번 배운 노래는 기가 막히게 부를 줄 안다.
자기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해서 꿈이 많다고 자랑하듯 똑부러지게 말하는 딸아이를 보며
문득, 엄마의 어린시절은 어땠을까...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나의 아이를 보면서, 엄마의 어린시절을 상상한다...
아이는 나의 거울이기도 하면서,
나에게는 미지의 세계인 나의 엄마의 모습을 짐작케 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참 신기하다.
엄마가 몹쓸 병에 걸려 버린 후, 아빠 혼자서는 도저히 엄마를 감당하기 힘들어졌을 무렵,
엄마의 친정, 나의 외가는 우리 가족을 외면했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에게도 엄마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다만 포항에서 태어나 자랐고, 7남매 중 다섯째였고, 제일 큰 오빠가 있고, 아래로 남동생 둘이 있었고
포항에서 머슴을 부리며 살 정도로 부잣집이었고, 키가 크고 잘난 큰 오빠는 그 시절 일본으로 유학까지 다녀왔다는 것.
엄마는 가끔 내가 외가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면, 이 얘기 저 얘기 자기가 기억나는 것들을 자랑스럽게 얘기해주었다.
야속하기도 하련만, 밉기도 하련만...
친정 이야기를 하는 엄마의 얼굴에 나는 모를 뿌듯함과 자랑이 어려있었다.
자라면서 온갖 맛있는 생선은 다 먹어보고 자랐다고 한다.
그 시절에 그 시골에서 책보가 아니라, 책가방에 책을 넣어 학교에 갔다고 하니 말 다한 거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고, 마치 지금 나의 딸아이처럼 교회에 가서 그렇게 찬양을 잘 부르고 율동을 잘하고, 앞에 나가서 발표 하는 것을 똑부러지게 잘 했었다고 한다.
'그 끼가 이렇게 대물림되는건가...' 생각하니, 힘없는 웃음이 피식 새어나온다.
엄마에게도 아득한 기억속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의 추억이 있는 듯 했다.
일찍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엄마를 많이 아껴주셨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런 엄마였지만,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던 어느 날 십수 년 만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뤘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울지 않았다.
나는 똑똑이 기억한다.
아빠로부터 부고를 전해들은 엄마의 싸늘하고 덤덤했던 표정을.
그때의 엄마는, 자신을 괴롭히는 갖가지 조현병 증상들로 인해 허물어질대로 허물어져 있었고
우리 가정은 허공 위 장대끝에 매달려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외할머니의 죽음이 얹어진다고, 더 슬퍼하고 더 절망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엄마는 포항에서 학교를 마치고 상경한 아가씨였다.
피아노를 독학했다.
그 시절 구하기도 힘들었던 피아노를... 게다가 독학이라니...
보통 똑똑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독학한 피아노 실력으로 서울 어느 동네 큰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교회 성가대 반주도 했다.
그 곳에서 아빠를 만났다.
엄마와 아빠는 연애를 했고, 뭐가 급했는지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아빠는 엄마와 결혼을 했다.
시리도록 추운 겨울 날, 아빠의 고향인 시골 작은 교회에서 젊디 젊은 엄마와 아빠는 평생 함께 할 것을 서약했다.
엄마와 아빠는 서울 쌍문동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작은 집에 세들어 살며 피아노 한 대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80년대가 아직 되지 않았을 때니, 피아노를 배운다는 것은 부모가 어느정도 경제적 능력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고, 동네에서 젊은 신혼 부부가 피아노 학원을 차렸다는 것은, 상당한 능력을 소유함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기대처럼, 피아노 학원은 당시 쌍문동의 있는 집 자식들로 북적여 나날이 커져갔다.
피아노 한 대가 두 대가 되었고, 좀 더 넓은 집으로 옮겨 세 대가 되고 네 대가 되고, 아직 군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아빠는 엄마를 쌍문동에 홀로 남겨두고 만 34개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간동안 군복무를 다녀오고, 엄마는 홀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며 쌍문동을 지켰다.
엄마는 2주에 한번씩은 칼같이 아빠 면회를 다녀왔고, 아빠가 제대할 날만 기다리며 피아노 학원을 키워나갔다.
당시 고졸 여성 경리 월급이 20만원 하던 시대에 한 달에 100여 만원이 현금으로 들어와서 제대한 이후로 아빠는 거의 매일 은행에 저금하려 들락거려야 했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학구열에 불타 지휘법, 화성악 등 음악에 대한 모든 지식을 흡수하며 아이들을 함께 가르쳤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유난히 쌍문동 아가 시절 내 사진이 많은 이유는, 그때만 해도 우리집 살림이 썩 괜찮아서 아빠가 그럴싸한 카메라를 한 대 가지고 있어 내 사진을 많이 찍어줬기 때문이다.
사진 속 우리집은 피아노 열 대가 놓인 피아노 학원이다.
젊은 엄마와 아빠가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진, 그 틈에 인형처럼 놓여 사랑받는 내 모습.
주로 이런 사진 몇 장이 남아, 당시의 영화를 증명해 준다.
그 무렵, 수강생들이 너무 많아서 학생들이 몰려오는 시간에 조를 짜서 대기했다가 수업을 듣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면 기다리는 학생들이 아장아장 걷는 나를 동네 놀이터로 데리고 나가, 엄마 아빠 대신 같이 놀아주기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사서 같이 나눠먹여주었다고 한다.
나는 쌍문동 영피아노 학원 귀하디 귀한 고명딸이었다
젊고 돈 잘벌고 그야말로 앞날이 창창한 부부에게 그 어떤 어려움도 없어보였다.
젊은 애엄마 아빠가 늘 바쁘니, 바로 옆집 용한약국 아저씨가 매일 안고 나가 약국에서 종일 끌어안고 봐 주기도 하고, 쌀집 아저씨 자전거 뒤 시루에 실려 쌍문동 여기저기 배달을 다니기도 했다.
아장아장 내 발걸음이 문방구로 향하면 그 날 그 곳에서 내가 지명하는 장난감은 모두 내 것이 되었다.
이때만 해도 엄마가 아프기 전이니, 면목동 사는 큰이모네와 자주 왕래를 했었다.
큰이모는 파란 사자 얼굴이 있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오는 으리으리한 양옥집에 살았고, 그 집에서 외가 식구들과 한데 어우러져 누구누구 결혼 잔치도 하고 함께 사진 찍었던 흔적도 남아있다.
누구 잔칫날이었는지 이모집에서 노랑 저고리에 분홍 치마를 입은 엄마가 나를 안고 찍은 사진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엄마 얼굴에 내 얼굴이 겹쳐 보인다.
옛 사진들을 보며 아련히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는 감상에 젖기보다, 먹먹한 한숨이 먼저 새어져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 속 찰나의 순간 처럼, 우리 인생에서 너무나도 짧아서 손에 잡기도 힘든, 연기같은 한 순간이었기에,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일에는 언제나 버거움이 앞선다.
여기까지가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진 속에서나 감상할 수 있는,
실체를 알 수 없이 구전되어 오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부유하고 편안했던,
전혀 현실같지 않은,
짧디 짧은 나의 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