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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소녀 May 13. 2020

관계의 바닥


사람들은 관계에서 그동안 몰랐던 자신의 바닥을 발견한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 감정에 휩싸여서 이성을 잃는, 내가 이 정도로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나, 하는 그 순간이다. 그 당시에는 그게 바닥인 줄도 모른다. 관계의 바닥이 언제였나, 하고 되돌아보면 그제야 바닥의 순간을 본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감정을 표출한, 가장 낮은 곳이 바닥이다. 


나도 다른 관계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내 바닥을 봤다. 아주 어린 나이였다. 스물다섯,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때였다. 너무 여렸음에도 내가 여리다는 사실을 몰랐다. 존재에 혼란만 있던 시기다. 나를 객관화할 수 있었더라면 아마 그렇게 어리게 행동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 감정을 그때 당시 가장 사랑하던 이에게 여과 없이 보여줬다. 입에서 나오는 말의 세기를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속엔 사랑이 가득하면서 입으로는 미움을 내뱉었던 그때의 바닥. 사랑이고 뭐고 지금은 너를 이겨야겠다는,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야겠다는 그 바닥. 사실 듣고 싶었던 건 미안하다는 말이 아니라,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말이었을 텐데. 그때는 그런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누구나 관계에서 이런 바닥을 본다. 결혼 이야기에 나온 스칼렛 요한슨과 애덤 드라이버의 싸움만큼은 아닐지라도.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바닥을 본다. 기억을 더듬어서 바닥을 찾아야 한다. 한 번쯤은 '아, 그때가 나의 바닥이었구나'하는 순간이 있다. 


바닥을 보았다는 건 상대에 대한 마음이 그만큼 깊었다는 뜻이다. 관계에 열정이 살아있으니까 그에 상응하는 미움과 화도 나온다. 그래서 가장 깊은 관계에서 가장 깊은 바닥을 본다. 나는 바닥을 딱 한 번 봤고, 그 후로 그것보다 깊은 바닥은 보지 못했다. 


그 바닥의 순간에서 감정을 달래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새로운 관계에서는 바닥을 볼 일이 없다. 상대와의 논쟁의 순간이 오면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안정감이 생겼다. 감정을 조금은 숨길 줄 알게 된 탓이다. 그만큼 감정의 진폭은 줄어들었다.


어떤 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바닥이 너무 나쁘지 않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맞다. 감당할 수 있는 바닥을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 우리 나이쯤 되면 바닥은 한 번쯤은 경험했을 테니, 그 관계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했다면 조금은 정제된 바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물어본다. 너에게 바닥은 언제였고 어땠었냐고. 말로 표현하는 친구도 있고 표현하지 않는 친구들도 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닥은 한 번뿐이라는, 바닥 이론에 공감한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바닥은 내가 그랬듯이 그들이 가장 오래 만났던, 가장 사랑했던 이들과의 관계에서 나온다. 


다들 그때는 감정이 너무도 깊었고 관계의 끝을 모를 만큼, 너무 어렸다. 

우리 모두 지금은 바닥을 딛고 조금은 더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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