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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소녀 May 20. 2020

이유 없이 밥 먹자는 말


가끔 연락이 끊겼던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오곤 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친구라고 하기에는 머쓱한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다. 갑자기 연락을 해서 잘 지내느냐고, 만나서 밥이나 먹자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연락했지?'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만나기 전까지 무슨 이유가 있어서 만나자고 하는 건지 추측해 본다. 그런데 보통 만나보면 아무 이유가 없다. 혹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면 꼭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냐고, 갑자기 생각나서 연락했다고 한다.


며칠 전에도 아는 학교 선배가 밥을 먹자고 했다. 당연히 무슨 이유가 있겠지, 했다. 목적 없이 밥 먹자고 하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왜 굳이 밥을 먹자고 하는 걸까 궁금했다. 만나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데도 별 말이 없길래 물어봤다. 혹시 무슨 할 말 있으시냐고. 그런데 아무 이유 없다고 한다. 그냥 학교 후배 밥이나 한 번 사주고 싶었다고. 아니 진짜로?


이유 없이 밥 먹자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리고 '연락'에 대한 내 태도를 바꾸는 계기가 될 말을 들었다. 


"연락했을 때 전화를 안 받아도 개의치 않아. 밥 먹자고 했을 때 바쁘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고. 모두가 바쁘고 연락을 건 나도 바쁘니까. '한 달만이든, 일 년만이든 나는 갑자기 생각나면 전화를 걸어. 친구든 사회에서 만난 사람이든 심지어는 직장 상사여도 그렇게 해. 아무 이유 없이 연락하고 밥 먹는 게 친구야' 


어떻게 관계에서 이런 의연함을 가질 수 있는 걸까. 


지금까지 누군가가 나를 만나자고 했을 때 그들의 목적을 찾으려던 내가 너무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인간관계에서 먼저 행동할 생각을 하지 않은 걸까. 왜 나를 찾는 사람과만 시간을 보내고 관계를 맺은 걸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사회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맺어지는 관계에서 늘 거리두기만 생각했다. 새로운 사람이 내 세계에 들어오는 걸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가까이는 오지 말라고 나름대로 울타리를 치고 있었던 거다. 친구라고 생각하면 친구가 될 수 있는 건데 애초에 내가 친구가 될 여지를 두지 않았다. 


살다 보면 문득 보고 싶어 지는 사람이 있고 잘 지내는지, 뭘 하고 사는지 궁금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나는 연락하지 않았다. 생각만 하고 말아 버렸다. 하루에 수십 번을 사용하는 카카오톡에 버젓이 연락처가 떠있어도 메시지 하나 보내지 않았다. 


업계가 어려운 요즘 전 회사 사람들 몇몇 분들이 연락을 했다. 문자도 아니고 전화였다. 전화벨이 울리고 그들의 이름을 보자마자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반갑고 감사하면서도, 먼저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먼저 연락드렸어야 하는데 전화 주셔서 진짜 감사하다고 말했다. 관계에서 감정적으로 받기만 한다.


어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을 바꿨다. 그래, 보고 싶은 마음이 들면,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전화를 하자. 전화 통화보다 문자가 편한 밀레니얼 세대라지만 차가운 화면의 텍스트보다는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더 친근하지 않나. 살다가 그리워진다는 건 한 때 같은 공간에서 추억을 공유한 사이라는 뜻일 텐데,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목소리 정도는 들어야 하지 않겠나. 


1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종종 생각이 자주 났는데 연락하진 못했었다. 신호음이 한 번 울렸는데 친구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놀란 목소리로 잘못 건 거냐고 물어봤다. 아니라고, 갑자기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했다. 그렇게 30분이 넘게 꺄르륵 거리며 통화를 했다. 왜 그동안 연락을 못했는지 아쉬울 만큼. 삶은 참 짧은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고 살고 있었다. 


앞으로는 연락을 망설이지 말아야겠다. 하루는 길지만 삶은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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