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 알고 있는 또 다른 힌디어의 세계
대학교 때 전공은 평생 따라다닌다고 누가 그러던데, 내 전공이 힌디어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힌디어의 필요성에 갑론을박이 이따금씩 있었다. '힌디어가 뭐예요?' 라던지 '인도는 힌디어 말고 영어 쓰지 않나?'라고도 했다. 그들에게는 그저 가십 정도에 불과했겠지만, 사실 나에게는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것이었다. 내가 구자라트에 주재원으로 나온다고 했을 때 어떤 분이 나를 힌디어도 할 줄 안다고 소개한 적이 있는데 상대방은 대뜸 거기는 구자라티 쓰잖아라고 하면서 힌디어는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얘기도 했었다. 사실이 아니지만 가서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해 머라 할 얘기가 없었다.
어떤 인도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은 유튜브나 책을 통해 힌디어를 쓰면 오히려 하층민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힌디어를 알아도 쓰지 말라는 다소 황당한 조언을 들어본 적도 있다
인도는 지역마다 굉장히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남부지역인 케랄라주, 타밀나두주와 북동부의 웨스트벵갈 같은 경우는 정말 다른 나라라고 할 정도로 많이 다르다. 언어도 구자라트는 구자라티, 마하라슈투라에는 마라티, 타밀나두에는 타밀 등 각 지역을 대표하는 로컬 언어가 있다.
우리 회사는 인도 전역에 지점이 있는데, 실제 모두 모여 회의할 때 보면 영어로 회의하기도 했다. 대부분 타밀나두의 첸나이 지역 직원들에 대한 배려다. 이런 것을 보면 인도 전 지역에서 통하지도 않는데 힌디어가 필요할까 라는 의문점이 충분히 생길 수 있다.
힌디어는 앞서 말한 타밀나두, 케랄라, 웨스트벵갈주를 제외하면 대부분 지역에서 사용된다. 모든 곳에서 Primary Language라고 할 수 없지만 Common Language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용된다. 4년 동안 많은 지역에서 미팅을 해왔지만, 타밀나두 첸나이를 제외하고는 힌디어가 모두 사용되고 있음을 경험했다.
4년간 구자라트에서 제조업 공장의 주재원으로 마케팅, 인력관리 업무를 경험을 하며 힌디어의 필요성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얻었다.
마케팅을 총괄했던 나는 수많은 고객사와 소통을 하였다. 미팅을 할 때면 흔히 알려져 있는, ‘인도 사람들은 무조건 영어로 비즈니스 한다’라는 사실이 잘못된 정보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같이 외국인이 있을 때면 영어로 미팅을 주도한다. 하지만 그게 비지니스 언어라기보다는 외국인을 위한 배려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영어로 대화를 하다가도 본인들끼리는 힌디어로 대화한다. 갑작스럽게 나오는 그들의 대화는 모두 힌디어였다.
고객사에 가면 미팅 초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크리켓 얘기도 하고, 날씨 얘기도 한다. 그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역시 나의 힌디어였다.
내가 힌디어 고유의 추임새인 "아차 (아 그래요?)", "마뜰랍 (그러니깐 내 뜻은~)" 자연스럽게 영어와 같이 사용하면 대부분 나보고 힌디어를 아냐고 물어본다.
그러면 내가 힌디어를 어디서 어떻게 배웠고, 내 힌디 이름은 무엇이고 등등 수백 번도 더 읊어서 너무 유창해진 문장을 얘기하면 다들 화들짝 놀라며 20분 이상 대화를 한다. 이보다 더 좋은 아이스브레이킹은 없었다. 십중팔구는 나의 힌디어 구사에 매우 호감을 갖고 즐거워한다. 당연히 첫 대면도 즐겁고 강한 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다.
인도 친구들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이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나 테니스장을 가면 소위 부자 친구들이라고 불리는 상류층 친구들이 많은데, 그 친구들과 영어로 대화하다가 한 번씩 힌디어를 사용해 주면 화들짝 놀라며 매우 반가워하고 더 나를 친근하게 생각한다. 오히려 나에게 힌디어로 대화하려고 한다.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무기가 된 것이다.
도대체 누가 힌디어를 쓰면 하층민을 오해받을 수 있다고 얘기했는지 어떤 경험에서 나온 얘기인지 궁금할 정도이다.
사실 인도에서 지내다 보면 인도인들이 영어를 매우 잘한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진실은 아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들에게도 영어는 공부를 해야 하는 언어이고, 막상 대화를 해보면 기대했던 것처럼 완벽하지 않다. 회사에서도 보면 영어를 하는 사람 60%, 잘 못하는 사람 40% 정도로 나뉘었다.
특히 공장 라인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십중팔구는 영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한다. 인구 센서스 조사에 따르면 인도인 중에 오직 10~14%만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1억이 넘는 인구라서 많은 숫자이지만 영어가 매우 일반화된 나라는 아니라는 뜻이다. 생각 보다 더 인도 영어에 과장된 것은 영어에 다소 자신감이 없었던 나를 포함한 우리 선배들 시절의 얘기가 아닌가 싶다. 요즘 한국 젊은 친구들이 인도인보다 영어를 못한다고 얘기할 수 없을 거 같다.
인력관리를 위해서는 공장 라인직원들 같이 영어를 못하는 직원들과도 충분한 소통을 해야 한다. 그곳에서 현장의 목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들이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서로 소통하지 못하면 그만큼 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현장의 목소리를 누군가를 통해 영어로 번역해서 듣는다면 얼마나 왜곡되는 부분이 많을까? 공장에 가서 직접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한국 관리자가 그동안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그 느낌을 아는 한국 관리자는 또 얼마나 되었을까?
평소 생활에서는 힌디어의 중요성은 정말 말할 것도 없다. 함께 다니는 기사와 편히 대화할 수 있고, 메이드뿐 아니라 어디 곳에 가더라도 현지어로 대화하면 좀 더 깊은 대화가 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문화를 알고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곳이 전혀 두려운 공간이 되지 않고 고향같이 편해진다는 것은 여러 번 말해도 부족하다.
하지만 힌디어를 우선 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첫 번째도 영어, 두 번째도 영어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어를 못하고 힌디어를 알고 있으니 현지화된 인력이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우매한 착각이다. 영어는 이제 더 이상 외국어가 아니다. 영어가 모든 소통에 기본이 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영어 구사는 기본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힌디어가 장착된다면 인도에서는 완벽한 필살기가 생기는 것이다. 영어를 못하면서 현지어만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운전을 한번 시작하면 편리함은 물론이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 성인이 되면 운전면허증을 취득한다. 식기세척기나 건조기는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사람은 불필요하다고 우기지만 한번 경험하면 빠져나올 수 없다. 인도에서 힌디어가 그러하다. 경험하지 못하고, 구사하기 전에는 필요 없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그것을 경험한 후에는 완전히 생각이 바뀐다. 비유가 조금 우스워 보일 수는 있지만 경험의 깊이와 반경을 넓혀주는 운전면허증처럼, 처음에는 필요 없다고 하다가 사용해 보면 새로운 세계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식기세척기나 건조기처럼 힌디어는 그러한 존재이다. 현지어를 통해 인도를 이해하는 깊이가 분명한 차별성이 있다.
예전에 학교 교수님께서 쓰신 한 칼럼을 본 적이 있다. 매우 공감하는 문장이다.
“인도에는 그들 고유의 전통 언어가 엄연히 존재하며, 그들은 가장 긴요하고 필요한 시점에 자신들의 언어로 의사소통한다. 그 언어에는 그들의 사고와 의식이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들의 정신과 생활문화에 접근할 수 없다. 현지어에 정통하고, 현지의 문화를 상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현지인들과 오랜 교분을 쌓으며 생활한 지역전문가는 현지인의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지역전문가가 되기 위한 선결조건은 현지어를 구사하고 현지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이다.”
인도 정부는 힌디어 의무 교육을 타밀나두주 등 전국적으로 확대하려는 강력한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정치적인 관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힌디어의 위치는 점점 높아져 가고 있다. 인도가 슈퍼파워로 부상하는 지금, 힌디어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