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슬픔에 대해
최근에 드라마 '정년이'를 봤다. 1956년도 경성, 여성 국극이 유행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 픽션으로 웹툰 원작의 드라마다. 주인공인 목포 소녀 정년이 국극단에 들어가기 위해 오디션을 보는데, 연기 시험의 주제가 '슬픔'이었다. 다른 경쟁자들은 자식의 죽음을 맞이한 부모, 연인과 헤어지려는 여성을 주제로 삼았다. 이때 정년은 전쟁 중 피난할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순간을 떠올린다. 그 모습은 눈물은커녕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마음이 꽉 막힌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심사위원인 단장이 묻자, 정년은 대답한다.
"자유롭게 대사를 하거나 크게 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런 연기를 했지?"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가 생각났어라. 그때 너무 슬픈께 가슴이 콱 막힘서 댑데 말도 안 나오고 울음소리도 크게 안 나오던디요."
너무 슬프거나 힘들면 오히려 아무 말과 반응도 하지 못한다는 것. 우는 소리도 못 낸다고, 어느 책에서도 읽은 적이 있다. 여기에 공감하는 걸 보니 나도 그런 슬픔을 겪었었나 보다.
하지만 그 에피소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힘드니까, 슬픈 기억은 무의식 중에 지워버리는 걸까. 그나마 떠오르는 건 올해 돌아가신 외할머니와의 이별이다. 평소 건강하셨던 분이 갑작스레 돌아가셔서, 온갖 죄송함과 슬픔이 밀려왔다. 그리고 지금 나의 살아있음에 울컥하게 감사했었다.
인간이 가진 여러 감정과 표현 중에 가장 솔직한 것은 눈물이라고 생각한다. 기쁨, 슬픔, 분노 등 정말 진심이 터졌을 때 나오는 것이 눈물, 울음이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1편에서도, 종반부에 슬픔이가 주인공의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을 도와주며 이야기는 극적으로 마무리된다. 투정만 부려서도 안 되지만 내면의 슬픔을 너무 드러내지 않는 것도 해롭다. 슬픔이가 감정을 컨트롤하던 그 순간, 영화를 보면서 제일 감동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학창 시절에는 내가 부러워하는 성향을 따라 하겠다고 무리한 적도 있었다. 항상 친구들에 둘러싸여 인기 있는 친구를 보며,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무턱대고 반장 선거를 나갔었다. 그러나 반 아이들 사이에서 후보 추천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무산되었었다. 당시에는 무척 속상하고 슬펐지만,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 했던 결과임을 이제는 안다. 애초부터 나에게 무리였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장점에 집중하기보다 부러워 보이는 모습만 좇았다는 것이다. 만약 반장 선거에 잘 나갔어도, 그 이후에는 계속 나를 억지로 꾸미려고 에너지를 쏟았을 게 틀림없다.
지금은 가장 나다운 모습을 발견하고, 또 그렇게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나 자신은 물론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들에게도 힘이 됨을 잘 안다. 앞으로도 그렇게 지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