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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니까 냈던 용기

서울 중구 '보헤이커피'

by grape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 비가 온다고 했다. 봄꽃 만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비라니? 괜히 조바심이 났다. 오늘의 맑은 날씨를 누리러 나가야만 했다.


요즘 당기는 디저트, '스콘'을 무작정 검색했다. 그러자 생각보다 많은 카페가 보였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궁금해 보이는 곳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보헤이커피'였다.



이 동네에 이런 카페가 있었나? 잘 몰랐던 이유가 있었다. 대로변이 아닌 골목 안쪽에 자그맣게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신비로운 공간으로 안내받아 가는 기분. 지인과 통화를 하면서 갔기 때문에, 다 도착해서도 그 주변을 잠시 맴돌았다. 카페 바로 건너편에는 슈퍼가 있었고 그 앞에는 주인인 듯한 한 어르신도 앉아계셨다. 정감 있는 풍경에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보헤이커피' 내부는 생각보다 더 작았다. 창가에 닿아 있는 1인석들, 그리고 테이블과 함께 있는 3인석과 4인석 자리. 처음에는 만석인 줄 알고 놀랐는데, 알고 보니 안쪽에 자리가 더 있었다. 조용하긴 했지만 햇볕이 닿지 않아 조금은 어두웠던 자리. 밝은 창가에는 2인 일행과 혼자 온 손님 사이에 자리가 딱 하나 비어 있었다. 어느 손님의 짐과 겉옷이 놓인 채로.


주문할 때까지만 해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을 온전히 누리려면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 창가에 앉아야만 했다. 그래서 겨우, 조심스레 용기를 내서, 먼저 앉아 있던 한 손님에게 물었다. '여기 자리 있나요?' 다행히 그 손님은 바로 자기의 짐을 치워주었다. 만세! 이제 내 자리가 생겼다.



짐을 옮겨놓고는 괜히 머쓱해져서. 바로 앉지 못하고 내부를 좀 더 둘러봤다. 사장님이 직접 만드셨다는 잔과 접시, 그릇들이 놓인 찬장. 손님들이 손글씨로 남기고 간 메모들. 사장님은 물론 이곳에 들른 손님들의 애정이 가득 남아있었다. 나도 짧게 메모를 남길까 잠시 생각했지만, 쑥스러워서 그냥 있기로.



이윽고 커피와 스콘이 나왔다. 사장님이 직접 내 자리로 조심스레 가져와주셨다. 딱 필요한 만큼 깔끔한 식기들에 담겨 나온 커피와 스콘. 마치 지인의 집에 초대받은 느낌이 물씬. 마침 한낮의 햇볕도 들어와 내가 참 좋아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일찍이 이곳의 '이용 안내문'을 읽어봤었다. 소리를 높이거나 사진을 더 열심히 찍으러 온 손님들이 많았나 보다. 협소한 공간인만큼 대화나 노트북 소리들은 작게 들리도록, 또 이곳에서의 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도록 사진은 '적당히 찍어달라'라고 하는. 정중하지만 단호한 문장들이었다. 단순히 커피나 디저트를 팔기 위한 곳이 아닌, 사장님이 정말 사랑하시는 공간이구나 하고 와닿았다. 처음에는 만석이었지만, 서서히 손님들이 가고 어느새 나만 남았다. 그러자 카운터를 지키던 사장님이 빈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것 또한 공간의 진수를 함께 누리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그러던 중, 한 남성 손님이 들어왔다.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지만 왠지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알고 보니 한 잔 걸치신 느낌. 비어있던 내 옆 자리에 무작정 앉아, 그 자리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게 아닌가. 결제도 사장님이 한 번 더 물어본 후에야 하고, 나중에는 욕설이 섞인 큰 목소리로 통화까지. 이곳에서의 시간이 흐트러져 속상해질 무렵. 다행인지 다른 여러 명의 손님들이 들어와 주의를 분산시켜 줬다.



그 남성 손님이 돌아간 후, 자리를 정리하러 사장님이 다가왔다. 그러고선 내가 앉았던 테이블을 똑똑 노크하셨다.


"많이 놀라셨죠? 괜찮으세요?"

"아, 네네. 사장님도 많이 놀라셨죠?"

"아휴 뭐.. 원래 취객은 못 들어오게 하는데.."


짧게 내 안부를 살피곤 카운터로 가신 사장님. 투박하지만 감동이 느껴지기엔 충분했다.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이다. 한 자리만 비어 있으면 그 공간을 잠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창가 자리를 향한, 혼자여서 낼 수 있었던 용기를 나 스스로 칭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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