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스웨이커피스테이션'
오랜만에 찾아온 맑은 날씨, 미세먼지도 적은 날. 요 며칠 느꼈던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바깥으로 나섰다. 이럴 때 SNS의 도움을 빌려본다. 한 독립서점에서 팝업 전시 매장이 열린다는 소식을 다시 꺼내보고는, 이내 연희동으로 향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한 번씩 타야 했지만, 지하로는 들어가기 싫어서 버스로만 가는 길을 택했다. 덕분에 20분 정도, 꾸벅 졸면서도 햇볕을 더 느낄 수 있었다.
홍대입구역 인근의 연남동은 몇 번 가봤지만, 연희동은 처음이었나 보다. 몇 번 와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좀 더 북적이는 연남동과 달리 연희동은 조용했다. 왜 진작 와 보지 못했을까. 책갈피 전시가 열리는 독립서점을 구경한 다음, 카페를 갈 작정이었다. SNS나 포털보다 지도 어플에서 눈에 띈 카페. 바로 '스웨이커피스테이션'. 이름이 뭔가 익숙했다.
그런데 독립서점부터 이 카페에 가기까지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그 사이 있던 작은 가게들이 내 시선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특히 서촌에만 있는 줄 알았던 한 엽서 가게의 연희점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그렇게 '스웨이커피스테이션'에 겨우겨우 도착했다.
진한 초록색 입간판과 문을 보니 마치 외국에 와있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외부와는 또 다른 외국 분위기가 났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구도로 '스웨이커피스테이션'의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런 고급스러운 반지하 공간이라니. 입구에서부터 난 계단을 내려가야 비로소 도착이었다.
만석인 줄 알았는데 다행히 2인석 하나가 비어있었다. 짐을 놓아둔 후, 카운터 가까이의 한쪽 벽을 차지한 메뉴판을 살폈다. 종류에 따라 'BLACK', 'WHITE', 'GRAY'로 나눠져 있었다. 'BLACK'은 에스프레소, 롱블랙, 더치, 필터 등 오리지널 커피. 'WHITE'는 라테, 비엔나커피 등 우유나 크림이 들어간 커피. 'GRAY'는 밀크티, 딥초콜릿, 차이라테 등이었다. 직관적으로 나눈 메뉴들에서 개성이 느껴졌다. 맨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A station for coffee travellers." 커피를 잘 알았으면 더 좋았을까 싶었지만, 이내 낯선 곳을 즐기는 '여행자'로 존중받는다는 생각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음료를 주문하자 직원이 카운터 위에 놓인 메모지와 깃펜에 대해 알려줬다. 메모지에는 앞선 손님들의 이름과 별명들이 영어로 적혀 있었다. 쿠폰에 쓰일 이름을 써달라고 한 것. 그렇게 적은 이름을 확인하고는, 직원은 카운터에 있던 타자기를 두드렸다. 카페에서 들리기에 낯설고도 흥미로운 타자기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나만의 기차표가 만들어졌다. 타자기로 적힌 내 이름이 있는, 이곳에서만 가질 수 있는 스탬프 카드. 리뷰들을 보다가 이 카페에 꼭 가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든 아이템이었다. 역시 이런 포인트들을 하나씩 만들어둘 일이다. 사람도 상품도 공간도.
주문을 마치고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테이블에 놓인 나무 트레이. 그 위에는 주문한 커피와 기차표가 담겨 있었다. 서빙되는 순간을 직접 맞이하지 못해 살짝 아쉬움도 들었다. 기차 여행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느낄 수 있었을지도.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혼자 책을 읽거나, 연인 혹은 친구 등 동행과 담소를 나누거나, 계단 쪽 자리에는 반려견을 데려온 손님도 있었다. (그 시바이누가 있어 이 카페가 더 호감으로 남은 것 같다). 스테이션(기차역)의 콘셉트를 가진 곳이었지만, 기차의 객실에 있는 느낌도 들었다.
연희동이란 동네에도 더 호기심이 생겼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예전부터 큐레이션 콘텐츠로 종종 봐왔던 소품샵들도 근처에 있는 게 아닌가. 천천히 책만 읽고 가려했는데 생각이 바뀌고 말았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서 '스웨이커피스테이션'에 머무를 시간도 갑자기 줄어들었지만, 그 여운만큼 다음에 또 오고 싶은 곳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함께 오면 좋아할 지인들이 떠올랐다. 그들의 반응까지 예상해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스웨이커피스테이션'을 나와 두 곳의 가게들을 더 찾았다. 그야말로 우연과 호기심이 만들어낸 여정이었다. 그것도 기대 이상의. 목적지인 줄 알았는데, 정말 말 그대로 스테이션이었다. 여정 중에 잠시 머물렀던. 그리고 다음 장소를 기대하게 만든. 모든 이를 여행자로 만들어버리는, 이렇게 신비로운 곳을 알게 되어 즐거운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