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가 되면 잊는 게 좋은 바둑의 정석처럼
요리는 레시피의 총화다. 레시피는 요리를 결정하는 명령이다. 레시피대로 요리하게 되면 크게 무리가 없다. 나는 요리를 처음 배우면서 레시피에 의존했다. 계량컵과 계량스푼으로 요리를 배웠다. 레시피는 친절했다. 초보자들에게도 요리가 가능한 것은 바로 레시피 때문이다. 요리를 대중화시킨 것도 레시피의 역할이다. 그만큼 레시피는 요리를 좌우하고 맛을 결정하는 비법 중의 하나다.
학원에서는 레시피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맛은 정말 그만큼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대로 따라 하면 신기하게도 어떤 작품이 완성된다. 그래서 레시피 찾는 것이 일이 됐다. 인터넷을 다 뒤지곤 했다. 레시피도 그렇게 많았다. 같은 메뉴라도 사람들의 레시피는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했다. 그런 레시피들을 휴대폰 메모장에 복사 저장해 두곤 했다. 주방에 요리책 대신 휴대폰을 올려놓고 요리하는 것이 손쉬웠다.
레시피는 요리하는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레시피가 없으면 요리가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마치 고3 수험생들과 비슷하다. 암기를 해서 시험을 치르는 꼴이다. 암기력은 일정한 시간을 넘어서면 잊히기 마련이다. 그 이전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외워야 하고, 그 유효기간을 갖고 시험에 임해야 한다. 레시피도 마찬가지다. 몇 번이고 보고 외우거나 따라 해야 하고 요리를 완성해야 한다. 그리고 잊어버리고 만다. 다시 요리하려면 또 레시피를 봐야 한다.
레시피를 고를 때도 고민이 많다. 인터넷에는 많은 레시피들이 있다. 재료 조합도 조금씩은 다르다. 초보 때는 레시피의 차이에 대해 그렇게 고민이 없다. 왜 그렇게 레시피가 나왔는지 보다 어떻게 하면 쉽게 할 수 있는지가 관심사다. 그렇다 보니 간단한 레시피를 먼저 찾게 된다. 그리고 쉬운 재료부터 눈에 들어온다. 뭔가 낯선 재료는 요리가 어려울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레시피가 최고였던 내게 엄마의 ‘손맛’은 신선한 충돌이었다. 장모님은 레시피에 관심이 없다. 그저 대략적으로 조합해서 음식을 만들었다. 내가 공들여 레시피대로 했을 때와 별반 결과가 다르지 않았다. 레시피가 최고였던 내게 던진 질문이 되었다. 요리의 전후 사정을 모른 초보시절이니까 가능했던 경험들이다. 지금도 레시피는 중요하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레시피대로 해야 한다고 보진 않는다.
바둑에는 정석이 있다. 초보들은 정석을 외워야 한다. 바둑은 몰라도 정석은 외운다. 정석을 기초로 바둑을 두게 된다. 그러면 그럴듯한 모양이 나오고 한 판의 바둑이 된다. 물론 승부는 또 다른 문제다. 바둑의 정석은 요리의 레시피에 해당한다. 고수가 되면 외웠던 정석에 의존하지 않는다. 요리도 고수가 되면 레시피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석이, 레시피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레시피는 나를 훈련시키는 조련사였다.
※ 요리 음식 사진들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