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특별했던 중3부터 고3까지의 저녁.
나는 P시 안에 있는 유치원 국민학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2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를 가끔 돌아보면 내 학창시절은 참으로 특수한 환경이었던 것 같다. P시에는 나라의 지원을 받으며 상당한 규모로 나라를 대표하는 기간산업을 일군 회사가 있었고, 내가 태어난 이후 아버지가 그 회사에 입사했기에 나를 포함한 가족들은 C시 A리에서 P시로 이사하여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큰 회사였던 만큼 어마어마한 회사 자체 시설 및 공장 외에도 회사는 임직원들을 위해 회사와 떨어진 곳에 종합 주거 단지를 구축해놓았고, 단지 내에는 미국의 주택 만큼은 아니지만 개별 공간과 공용 녹지공간을 둔 상당한 세대수의 단독 주택 및 일반 아파트 형태의 공동 주택은 물론 결혼 안한 직원들을 위한 숙소인 독신료, 회사 축구단과 일반 거주민이 같이 이용하던 목욕탕, 미장원, 이발소, 볼링장, 뷔페 등을 다 갖춘 당시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내부 분수대가 있었던 특이한 형태의 복합 쇼핑몰센터, 단지내는 어디든 동전 없이 통화가 가능한 무료전화부스, 연극이나 뮤지컬 등 공연 상영을 겸하는 에밀레 종소리가 시그널로 유명한 영화관, 동물원이 있던 유치원, 서울리라국민학교와 똑같은 교복을 입는 자매학교 였던 국민학교 2개 - 그 중 하나는 우주를 컨셉으로 당시 국내에선 찾아보기 힘든 planetarium이, 다른 하나는 바다를 컨셉으로 여러가지 해양 박물관이 있었고. 남자는 무조건 스포츠 여자는 무조건 단발을 해야 했던 중학교와 같은 스타일로 다녀야했던 고등학교가, 그리고 공업고등학교가 있었다. 그 외에도 대학교, 연수원, 임원 숙소 및 VIP 방문용 별장, 스포츠 컴플렉스 시설, 부녀 및 노인 친목용 회관 등 유흥시설은 배제된 나머지의 다양한 시설들이 거대한 공원 같은 녹지 내에 여기저기 보기좋게 어우러져 있었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살았으나 지금 생각하면 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한 1970~80년대의 그 옛날에 어떻게 그렇게까지 다양하고 편리한 시설이 거의 다 갖춰진 주거 단지를 구상하고 상당한 금액을 투자해 높은 품질과 멋진 디자인으로 만들었는지 새삼 대단하고 놀랍다. 이렇게 임직원에 대한 회사의 대단한 배려만큼, 단지 내 위치했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어머니들의 엄청난 배려를 받았다. 물론 선생님들의 사랑의 매와 선배들의 군기잡기가 당연시 여겨졌던 때라 늘상 비인간적인 체벌과 매를 감내해야 했던 학교생활은 다른 도시의 학교들과 마찬가지였겠지만, 어쨌든 어머니들의 배려는 특별했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등교길이 똑같았다. 버스를 타고 오거나 가까운 거리에서 걸어오는 학생들도 몇 있었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학생들은 출근길에 오르는 아버지들의 배려를 받아 등교길의 언덕 밑에까지 자가용을 타고 와서 거기서부터 5분 10분 거리를 걸어 등교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차도와 인도가 있는긴 언덕을 오르면 오른쪽에 중학교가 길 왼쪽에는 실내체육관이 있었고 거기서 좀 더 올라가면 직선 차로는 중간에 키낮은 정원수가 잔뜩 심겨진 커다란 라운드어바웃을 만났으며 그 오른쪽으로 고등학교가 왼쪽으로는 공업고등학교가 있었고 직선으로 뻗어올라간 언덕길의 윗 끝은 식당과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건물로 마무리가 되어 있었다. 나는 3년을 언덕길의 오른쪽에 있던 중학교를 또다른 3년을 역시 언덕길의 오른쪽이면서 중학교의 윗쪽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으며 같은 학창시절을 보냈던 학생들은 입시를 위해 야간자율학습을 해야했던 중3부터 고3까지 4년간 어머니들의 특별한 배려를 받았다.
저녁 시간이 6시가 되면 학생들이 가방을 메고 등교했던 언덕길은 어머니들이 자가용을 타고 혹은 소형 전세버스를 타고 등교했으며 어머니들은 각자 집에서 갓지은 밥과 반찬 그리고 따뜻한 국이 든 도시락을 손에 들고 있었다. 6시에 수업을 마친 학생들은 모두들 우르르 내려와 자기의 어머니를 찾아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도시락을 들고 교실로 돌아갔으며 삼삼오오 둘러앉은 저녁시간은 뚜껑을 열면 갖가지 반찬과 국에서는 김이 올랐으며 당연히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하얀 쌀밥은 물론 불고기나 제육볶음 소고기 구이 상추를 곁들인 구운 삽겹살 등 고기류와 기름에 굴린 햄 쏘세지 달걀말이 같은 베스트셀러들과 뜨거워서 입을 데일 정도의 소고기뭇국이나 육개장 오뎅국, 한장한장 정성스레 참기름을 발라 구워낸 김 그리고 이것들을 잔뜩 먹고나면 입맛을 다실 과일이나 빵 과자 음료수 같은 후식도 같이 있었다. 때로는 별식으로 콩국수나 칼국수 류를 또는 햄버거를, 어떤 학생의 경우는 밥이 먹기 싫다고하자 어머니가 라면을 끓여온 경우도 보았을 정도로 늘 그렇게 저녁 시간은 엄청났고 종종 짜장면 짬뽕 피자처럼 예상을 뒤엎는 메뉴들과 반 학생들이 다같이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 박스들이 등장하고는 했다. 단지 내 거주했던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머니들이 매일매일 공들여 갓지은 저녁을 먹을 수 있었고, 도시락 업체를 통해 맛없는 저녁을 받아 먹던 자취생들이나 멀리 시내에서 통학하며 점심저녁 도시락 2개를 싸와 찬밥을 먹어야 했던 친구들과 같이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이렇게 단지 내의 어머니들은 매년 매일 당신들의 자식은 물론 타지에서 온 자식들까지 몇년 이상을 정성으로 저녁을 지어 먹였고 이런 현상은 십수년을 지나오며 어느새 어머니들의 전통처럼 굳어졌으며 그래서 그곳의 학생들은 어머니들이 경쟁하듯이 더 맛있고 따뜻한 식사를 지어 자식들에게 가져다 바치던 저녁시간을 오랫동안 경험했기에, 얼마나 어렵고 대단하고 특별한 일인지 몰랐고 그래서 고마움 역시 잘 몰랐다.
그런 우리를 가르치던 선생님들도 이런 광경이 십수년이 이어지니 다들 익숙했겠지만, 그래도 고3때 국어를 담당했던 선생님은 정확하게 보이는 그대로 짚어 얘기했다. 이렇게 어머니들이 매일 손수 지은 저녁밥을 차를 타고 와서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희한한 저녁 시간의 광경을 보여주는 곳은 단언코 전국에 한군데도 없을 거라고. 아주 팔자 늘어지게 받아먹고 산다고. 이렇게 극진한 저녁을 먹고도 공부를 안하거나 못하면 진짜 쳐죽일 정도로 나쁜 놈들이라고 그렇게 얘기했으나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그냥 공부하라는 막연한 잔소리로 생각했다. 나중에 재수를 하기 위해 상경했던 나는 노량진의 학원과 기숙사와 하숙집에서 전국의 고등학생들을 만났고 그들과 친해지면서 나와 내 친구들이 누렸던 그 4년동안의 당연한 저녁시간이 사실은 정말 특별한 시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절 나의 어머니는 물론 친구들의 어머니들 선배와 후배들의 어머니들은 어떤 생각으로 매일 저녁을 그렇게 정성들여 짓고 나르셨을까. 어머니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이 아프나 집안일로 바쁘나 그 수많은 일상의 순간들을 이겨내며 입시를 준비하는 자식들에게 따뜻한 밥과 국으로 조금이라도 힘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고 그렇게 매일매일을 기도하듯 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다니셨을 것이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한다는 입시는 학생들에게는 두렵기만 했고 그래서 매일 책상앞에 20시간 가까이 열심히 앉아 있어도 우리들의 미래는 늘 무섭고 깜깜했다. 그 깜깜한 몇년의 밤을 등대처럼 비추던 어머니들의 저녁 도시락. 지금은 고등학교가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저녁을 포함한 모든 식사는 학생식당에서 해결한다고 들었으니 이제는 그 고생스럽고 유별난 전통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때의 저녁 도시락들은 더 대단하고 특별하게 그리고 유난스럽게 느껴진다. 그 시절이 그립지만 또 다른 어머니들을 위해서 그리워해서는 안된다. 그저 옛날 이야기처럼 전해지기만 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