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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M Nov 26. 2021

1. 모두의 반격

<서른의 반격>, 손원평

*이 글은 2021 협성독서왕에 제출한 글을 수정 후 게재한 글입니다.


  “저기야, 내가 대학원 과제 때문에 영어 에세이를 좀 써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나?”

  책을 읽다 문득 군대에서 모시던 실장님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실장님은 전역 후에 강의를 나가시려는지 학위 공부에 그렇게 열심히셨다. 단, 발표자료 만들기와 영어 과제를 해야 할 때는 쏙 빼고. 부하 장교들이 열심히 만들어준 피피티를 일일이 출력하여 제본하는 것이 나의 업무 중 하나였다. 영어 과제의 경우 한글로 대략적인 내용을 써주시면 내가 살을 붙이고 네이버 한영사전을 검색하여 글을 완성했다. 평소엔 나름 합리적인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주문하셨다. 나라를 지키는 일에 ‘영어 숙제 대신해주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서른의 반격> 덕분에 기억 저편에 묻혀있던 여러 경험이 꺼내졌다. 군대에서의 일화 말고도 당시엔 ‘이걸 하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든 일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비슷한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둔감해져버렸다. 비록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온갖 ‘갑질’ 사건이나 소설 속 규옥, 지혜, 무인, 남은 등이 겪은 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나 역시도 한국 사회에 미만한 부당함과 위선의 그림자 끄트머리에 걸쳐진 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곱씹어 생각하니 주인공들처럼 반격에 나서지도 못한 게 좀 억울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이 소설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부당함과 위선을 참고 견디기만 하던 주인공 지혜가 같은 회사에 입사한 규옥과 함께 경쾌한 반격에 나서면서 바뀌어가는 이야기이다. 그 과정에서 지혜는 더 이상 자신이 놓인 부조리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이를 극복해가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다. 지혜와 규옥은 더러운 습관을 가진 부장에게 일침을 가하는 익명의 우편물을 보낸다든가 위선적인 국회의원에게 엿을 건네주고 날계란을 던지는 등 소소하지만 직접적인 행동으로 반격에 나선다. 이러한 모습이 현실에서 딱 반걸음 앞선 용기처럼 느껴져 몰입하기 쉬웠다. 초인적인 의지가 아니라 ‘김지혜’라는 이름만큼이나 평범한 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작은 용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방식이 맘에 들었다.

  무엇보다 책이 잘 읽혔던 이유는 주인공의 처지가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서른 살인 주인공을 통해 비춰진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 인간관계 속 문제가 올해 서른한 살인 내가 겪었던 일들과 겹쳐지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문화 콘텐츠 기획이라는 원대한 꿈을 품었지만, 기껏해야 대기업 입사시험에 지원한 지혜가 느꼈던 괴리감과 실망감, 직장이든 가정이든 서둘러 안착한 상사, 친구들이 한 마디씩 건넨 힐책은 얼마 전까지 유학을 준비하며 깊은 배움을 꿈꾸던 내 기억과 똑 닮아 있었다. 또 내가 서른이 되던 2020년, 결국 취업 준비를 하기로 하고 독서실에서 마스크까지 쓴 채 ‘없는 사람’으로 지내야 했던 내 모습이 반지하방에 사는 인턴 지혜와 묘한 동질감을 형성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했지만 소심한 반격조차 꿈꾸지 못했던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소설의 치밀한 묘사와 주인공의 처지에 감정이입한 덕에 읽는 내내 무릎을 탁 쳤다. 특히 주인공과 동화되어 책을 읽다 보니 주변 인물들의 말이 더욱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중 유독 기억에 남는 구절들이 있었다. 이 말들은 현실에서 반격을 꿈꾸던 나 자신을 의심하게 했고 좌절시키기도 했으며 때로는 더 외롭게 만든 말들과 매우 비슷했다.


(초빙 강사들의 불합리한 요구나 김 부장의 외모 지적 등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때마다 지혜의 직속 상사인 유 팀장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  

“사회생활 안 해본 티가 이런 데서 난다니까.”
“더 살아봐. 결혼해서 애도 둘쯤 낳아보고.”
“지혜 씨, 나 애 둘 놔두고 오는 거다? 때맞춰 퇴근해야 할 일도 많고 애들 감기라도 걸리면 사정 봐달란 말도 가끔은 해야 해. 그러면서 계속 일하려면 내가 어떤 것까지 참아야 하는지 자긴 아직 알 수 없겠지.”


(20대 시절 누구보다 기성 제도를 반대했던 지혜의 친구 다빈이 결혼 후 하는 이야기)

“너 사람이 언제 어떻게 보수화되는지 알아? 명백한 자기 재산이 생길 때야. 절대 빼앗기거나 침해될 수 없는 것, 집이나 돈이나 그럴듯한 밥그릇이 생길 때. 근데 나한텐 그게 애야...(중략)...나는 집 밖의 몹쓸 것들로부터 가족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투사가 되는 거야. 그러다 보면 점점 보수화되지. 나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기 힘들어지거든...”  


(더러운 습관과 배려 없는 행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김 부장이 사직서를 낸다며 하는 말)

“나도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거든. 난 말야, 지혜 씨 태어날 때쯤 거리에 나갔던 사람 중 하나였어. 세상은 잘못 돌아가고 있으니까 바꾸라고,...(중략)...나 같은 것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어, 그땐. 세상이 바뀌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세 명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반격에 나서려고 할 때마다 주위 선배나 어른들로부터 한 번쯤은 들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유 팀장처럼 소신 있는 반격을 젊음의 객기 내지는 특권처럼 묘사하는 사람, 다빈처럼 보수화된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체념시키는 사람, 김 부장과 같이 세월이 흘렀음을 이유로 현재 자신을 합리화를 하는 사람. 모두 하나같이 반격이 덧없거나 젊었을 때만 반짝 가능한 일인 것처럼 여기며 말한다. 그리고 여기엔 없지만, 겉으로는 반격을 격려하면서 정작 자신은 뒤로 쏙 빠지고 젊은 세대가 직설적인 의견을 제시할 것을 종용하는 얄미운 부류도 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의 말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을 젊은 세대와 구분 짓고 방관하는 듯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반격을 젊은 세대 일부의 일시적인 객기 내지는 특권인 것처럼 묘사한다는 것이다. 각자의 처지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방관하거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분노와 얄미움이, 때로는 아무도 함께해주지 않는다는 외로움의 감정이 울컥 올라온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으며 머릿속에 한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제목에 있는 ‘서른’이라는 구체적인 숫자 때문이었을까, 반격은 반드시 ‘서른’의 몫인가?

  서른의 몫인지를 따지기 전에 ‘반격’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았다. 규옥과 지혜가 보여준 일련의 내적 고민과 행동을 ‘반격’이라고 본다면 ‘반격’은 자아를 더 분명하게 세우고 표현하면서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불합리한 심리적・사회적 제약을 바꿔보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거창하게 적었지만, 소설 속에서 규옥이 자신의 노동을 부당하게 착취한 박창식 교수에서 일침을 가하거나 지혜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공윤에게 공개적으로 친구 사이가 아님을 선언하는 것도 ‘반격’에 포함된다. 단순히 내 권리만을 챙기자는 이기적인 선택과는 조금 다르다. ‘반격’ 속에는 부당함을 폭로하여 약간의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옳지 않은 현 상태를 개선해보고자 하는 용기가 숨어있다. 요컨대 ‘반격’은 주체적 자아를 침범하는 부당한 행동, 압박 등을 참거나 방관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내 고쳐보려는 태도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격은 과연 ‘서른’, 즉 ‘서른’으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의 몫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격을 ‘서른’의 몫이라 단정 지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주체적 자아를 표출하고 개인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제약을 바꿔나가려는 노력에 나이나 세대 구분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격을 결정짓는 주요한 요소는 개인의 의지나 용기이지 나이나 세대가 아니다. 일례로 자신이 속한 조직의 비리를 폭로하는 내부고발이나 미투(Me Too)운동처럼 성적 폭력을 공론화할 때 반격에 나서는 나이나 세대가 정해져 있다고 보기 어렵다. 비리나 성폭력보다 가벼운 일상 속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사의 무례한 언행이나 습관에 대해 불편함을 표출할 때 나이나 세대에 따라 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폭언을 들었는데 젊은 세대만이 반격하라는 건 적절하지 않다.  

  특정 세대에 어떠한 이미지나 특징을 부여하는 세대론, 세대 역할론은 개인이 가진 다양성과 자기표현 방식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난 세대론이 늘 절반만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밀레니얼(millennial) 세대는 당당하고 합리적이며 직설적인 언행이 두드러진다던데 왜 1988년생인 지혜는 그런 모습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가? 청년도 아닌 중년의 남은 아저씨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국회의원 한영철에게 계란을 던지는가? 이것은 반격이 세대적 특성이 아니라 각 개인의 성장 과정, 현재 처한 상황, 개인이 발현하는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개인의 의지와 더불어 반격에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지혜, 규옥, 무인, 남은이 보여줬던 세대를 초월한 연대이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서로를 위해 조금씩 용기를 발휘했던 것이 모두가 반격에 나서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반격을 위해선 개인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함께하는 평범한 여럿의 용기도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소설에서처럼 이러한 연대가 허무하게 와해될 수도 있으나 각자의 상황과 세대에서 겪는 서로 다른 제약에 공감한다면 함께 성공적인 반격을 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유 팀장과 지혜처럼 서로 다른 세대가 같은 문제(김 부장의 무분별한 언행)로 고민하고 있다면 오히려 연대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런 상황에서 젊은 세대에게 반격의 역할을 전부 떠넘기는 것은 지나치게 무책임한 태도는 아닐까?

  지혜 친구 다빈의 말처럼 현실에선 지켜야할 가족이나 재산이 생기면 반격을 망설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주체적 자아보다 가족과 재산의 평안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지 나이가 많고 적음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가족과 재산의 평안을 위해 할 말을 삼킨다하더라도 적어도 다른 이들과 소통을 통해 문제에 대한 진솔한 견해를 밝히거나 다른 세대와 공감을 바탕으로 느슨하게라도 연대를 하는 선택을 얼마든지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시도도 없이 반격에 대해 비아냥거리거나 반격을 젊은 세대의 몫으로만 돌린다면 그것은 세대론을 궁색한 변명 삼아 문제를 방관하는 것에 가깝다.


  이렇게 나 스스로 ‘반격’은 결코 ‘서른’만의 몫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지만 10년, 20년 후에 내가 같은 입장을 견지하지 못할까 두렵다. 양심이 있는 보통 사람이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에서 그른 선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 사람들은 ‘옳은 것과 쉬운 것’ 사이에서 쉬운 것을 선택한다. 침묵과 회피는 쉽고 반격은 어렵다. 나 자신이 쉬운 선택만을 반복하여 옳은 선택을 ‘서른’의 몫으로 떠넘기지 않도록, 적어도 군대에서 영어 숙제를 대신해 주는 것과 같은 문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반격은 꾸준히 해내고 싶다. 그때마다 <서른의 반격>과 이 글을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 반격은 ‘서른’의 몫이 아니라 ‘모두’의 몫이라고. ‘모두’의 반격을 위해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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