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할 결심

by 알럽ny

#배신감

지수는 원석을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동안 서울에 정착하기 위해 애써온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나와 상의도 없이 저런 선택을 할 수가 있을까? 지수는 이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원석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신뢰가 없어지는 것이 너무 슬펐다. 오랜 연애로 뜨거운 감정이 식었음에도 원석을 택했던 것은 에리히 프롬과 알랭드 보통의 책에서 보았듯이 남녀 간의 뜨거운 열정은 지속되기 어렵다는 것을 공감했기 때문이고 사랑 다음에 오는 것은 권태와 안정이지만 그 바탕에 서로 간의 존중과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성숙된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수는 원석을 신뢰했고 평생 함께 살아갈 동반자로 생각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원석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안해졌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원석은 지수에게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이번 건은 지수의 그런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고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슬픔과 원망 분노의 마음이 휘몰아쳤다.









일에 집중하지 못한 하루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했던 지수는 피로감이 몰려왔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실패'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단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 그렇지만 지수는 엄마였고 유진을 돌봐야만 했다.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지. 지수의 삶의 방식이었기에 일상에 큰 흔들림은 없었다. 뉴분당선을 타고 라테마트에 내려서 유진이가 좋아하는 소고기를 사고, 같이 구워줄 야채로 방울토마토와 호박을 샀다. 계산대에 서서 앞에 줄 서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유진은 '이 사람들은 나처럼 이런 상황이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한다. 거의 매일 지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무탈한 하루를 보내고 안온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힘을 내자고 자신을 다독이며 유진을 마중하러 나갔다. 영어학원 차에서 내리는 유진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안아줘야지. 유진은 지수를 발견하자마자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손을 흔들고 있다. 예쁘고 환한 미소를 띤 채로. 그래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힘을 내자. 지수는 내리는 유진의 손을 잡고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묻고, 오늘 엄마는 유진이 생각을 했고, 마트에서 유진이 좋아하는 소고기를 사뒀고, 저녁메뉴는 스테이크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유진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엄마가 이렇게 마중 나오니까 너무 좋다고 말한다. 순간 유진은 또 생각한다. 원석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휴직을 할 계획이었는데.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자신이 너무하다 싶으면서도 다시금 원석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솟구쳤다. 이 결혼 그만둬야 하는 걸까?







지수는 원석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원석도 그런 지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매일 야근을 하고 유진과 지수가 잠들 때쯤 돌아온다. 따뜻하게 구워진 소고기를 유진의 입에 넣어주면서 지수는 이혼을 떠올린다. 혼자 유진을 키울 수는 없는 걸까? 나 혼자 키우는 건 무리일까? 여러가지 대안을 떠올리면서 지수는 현실적으로 쉬운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직 유진은 손이 많이 가는 시기고, 아빠를 좋아한다. 내 감정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유진에게 숙제를 시켜두고 지수는 설거지를 하러 주방에 갔다. 지수는 설거지를 하면서 너플에서 인기있는 드라마를 종종본다. 오늘은 자신의 생각의 고리를 끊고 싶어서 드라마를 골랐다. 나랏님 주연의 <베드 파트너>를 보았다. 이혼전문 변호사인 나랏님이 주인공이다. 큰 로펌에 이혼관련된 변호사로 일을 하면서 자신의 배우자의 외도를 겪는다. 다양한 부부간의 문제를 보면서 지수는 어느 가정에나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다. 2배속으로 빠르게 돌려보니 나랏님 남편도 바람을 피우고 나랏님은 역시나 이성적으로 판단을 한다. 일시적인 것일 거고 이 이혼을 했을 때 '실익'이 있는지 계산을 한다.




부부는 어쩌면 직장동료나 친구보다도 훨씬 이해관계가 깊어. 그래서 감정보다는 좀 기능적으로 존재할 필요도 있어. 장기관계니까.(굿파트너 명대사 인용)


화면에 자막으로 뜨는 대사를 읽으면서 지수는 생각한다. 그렇지. '기능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지. 이혼에 대해 감정을 배재하고 현실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혼숙려기간

이번 CHESS는 라스베가스에서 열렸다. 원석도 미국으로 출장을 간다고 했다. 일주일간 원석이 없다. 혼자 유진을 돌봐야한다. 이혼을 생각하던 지수는 혼자 속으로 생각한다. 이건 이혼 숙려기간이야. 그리고 이 기간동안 이혼 후 혼자 유진일 키우는 걸 가늠해봐야겠어.




원석은 출장을 갔고 지수의 나홀로 육아가 시작되었다. 주말엔 유진이 할머니 집에 가고 싶다고 해서 지수는 유진이를 할머니집에 데려다주었다. 친구들을 만나고, 지수 근처에 사는 지인들을 만나면서 편안하고 홀가분한 하루를 보냈다. 이혼을 한다면, 주말엔 원석이 데려갈테고 나는 이렇게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겠지. 지수는 혼자 생각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들과 커피를 마셨다. 일요일 저녁에 유진이 집으로 돌아왔고 지수는 유진을 씻기고 내일 먹을 카레를 만들어두었다. 야채 껍질들이 음식물 쓰레기통에 수북하게 쌓였다. 음식물 쓰레기는 원석 담당이었고 원석은 거의 매일 음식물 쓰레기를 비웠다. 유진은 귀찮았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떴을 때 는 이미 7시 30분이었다. 늦었다. 유진의 등원시간에 맞추기 위해 유진을 일으키고 준비를 해서 등원버스에 태웠다. 지수는 샤워도 하지 못 한 채 옷을 입고 화장을 했다. 하지만 음식물 쓰레기가 신경쓰였다. 이렇게 더울 땐 벌레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지수는 그냥 회사로 가지 못했다. 늦더라도 저 쓰레기를 버리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음식물 쓰레기 카드를 챙기고 서둘러 내려갔다. 아, 등원과 쓰레기비우긴 원석이 했는데. 이혼한다면 아침 준비시간을 최소 20분은 더 써야겠는걸. 지수는 이혼을 통해 잃을 편리를 계산했다. 그래.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지수는 이제 원석을 믿을 수 없었다. 마음 속 배신감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늦었고 서둘렀으나 아무래도 택시를 타야할 것 같았다. 부디 오늘 양재터널이 밀리지 않길 바라면서 지수는 급하게 택시를 불렀다. 가끔 이렇게 택시도 타야할테니 그 비용도 계산에 넣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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