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김현우는 전략 제안서 회의를 앞두고 자료를 정리하며 프레젠테이션 리허설을 반복했다. 단순한 리뉴얼이 아닌, 기업의 이미지와 고객 경험을 새롭게 정의할 전략적 컨셉이 핵심이었다.
“이번 전략의 타이틀은 ‘Industry Identity Rebranding’이다.”
그는 제안서의 첫 페이지에 이 문구를 써넣었다. 더 이상 단순 제조기업의 이미지가 아닌, 공작기계 분야의 미래 기술을 선도하는 기업으로의 재포지셔닝. 그것이 그의 기획 방향이었다.
화면에는 두 개의 키워드가 떠올랐다.
【Rebranding】 산업기술기업에서 ‘하이테크 파트너’로의 이미지 전환
【Digital Experience Structure】 사용자 중심 디지털 익스페리언스 구조로 ‘공작기계 탐색의 새로운 방식’ 제시
※ 미래에는 'UX'라는 용어가 주류가 되지만, 지금은 대기업 컨설팅 업계에서 '디지털 익스페리언스'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초기 단계다. 김현우는 이 표현을 의도적으로 선택해,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을 전달하려 했다.
“공작기계는 단순히 공장 바닥에 놓이는 설비가 아니라, 스마트한 생산을 가능케 하는 핵심 시스템이다. 이를 시각적으로도 체감할 수 있게 하자.”
김현우는 기존 CMS 고도화 외에도 주요 컨셉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디자인 아이디어를 구체화했다. 메인 페이지에는 고정 배너 대신, 영상 콘텐츠와 인터랙티브 제품 탐색 인터페이스를 도입해 제품군 탐색 자체가 기업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제품을 찾는 과정에서 고객이 자연스럽게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어? 이건 뭔가 다르다’고 깨닫게 만드는 것. 겉으로 보여지는 것보다 경험에서 느껴지는 차이를 만드는 거야. 그게 핵심이야.”
오지수와의 협업도 더욱 긴밀해졌다. 김현우는 인터페이스 설계도를 보여주며 말했다.
“지수 씨, 이 부분은 Ajax 기반으로 실시간 탐색 구조 만들 수 있죠?”
“가능합니다. 디바이스별 최적화도 준비해 둘게요.”
김현우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회의실에서 최종 제안 리허설을 마쳤다.
그날 오후, 고객사 프레젠테이션.
“이번 전략은 단순한 개편이 아닙니다. 귀사의 미래 산업 이미지를 웹을 통해 선제적으로 선보이고, 고객 접점의 구조 자체를 혁신하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입니다.”
김현우는 마음속으로 웃었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단어는 원래 미래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였다. 지금 이 시대엔 아직 낯설고 생소할지 몰라도, 곧 모든 산업의 화두가 될 단어다. 그는 일부러 그 표현을 제안서에 녹여냈다. 이 기업이 시대를 선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기 위한 전략이었다.
회의실 안이 잠시 정적에 잠겼다. 그 뒤, 고객사 이사가 조용히 말했다.
“...굉장히 새로운 접근입니다. 그런데 예산은?”
김현우는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는 웃으며 자료를 넘겼다.
“이 제안은 단순한 리뉴얼이 아닌 전략적 전환입니다. 우리가 제시한 구조를 기준으로 한다면, 총 예산은 3억입니다.”
순간 회의실 공기가 싸늘해졌다.
고객사 내부 실무자가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존 예산은 1억이었다. 그 차이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김현우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덧붙였다.
“다음 회의에서 구체적인 세부 항목과 ROI 분석 자료까지 제시하겠습니다. 지금은, 이 전략의 가치만 판단해 주십시오.”
회의는 끝났지만, 내부 분위기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실무자는 고개를 저었고, 중간관리자는 예산안 재검토를 언급했다. 그리고 경쟁사의 저가 제안 가능성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현우는 복도로 나오며 혼잣말을 했다.
“이제 진짜 싸움이 시작되는군.”
하지만 싸움은 고객사만이 아니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내부 회의가 열렸다. 부장급 실무 책임자인 박상철 부장이 회의실을 정적 속으로 몰아넣었다.
“김 이사, 아무리 좋은 제안이라도 현실을 봐야죠. 고객 예산이 1억인데 우리가 3억짜리 제안을 던져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발질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단단히 감정이 실려 있었다. 김현우가 대리 시절부터 늘 갑질을 일삼던 상사였다. 그의 말에는 노골적인 조롱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말이죠, 대리급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고객사 미팅이면 그 결과를 상사한테 보고하고 끝내야죠. PM급 업무를 왜 대리직급이 주도합니까? 오지수 씨는 개발자지 PM이 아닙니다. 이건 조직 시스템을 무시한 거라고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팀원들 모두 눈치를 살폈다. 김현우는 박상철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박상철이 말을 덧붙였다.
"이번 사업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사업입니다. 이 인원들이 투입한 비용도 생각해야죠. 실패 시 리스크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김현우는 강한 어조로
"부장님, 조직 시스템은 현실을 따라가야지 과거 틀에 갇혀 있으면 안 됩니다. 지금 필요한 건 직급이 아니라 실행력과 방향입니다.”
“그래서 대리급에게 고객사 제안 프레젠테이션까지 맡기겠다는 겁니까?”
“아뇨. 그래서 내부 PT를 준비하려 합니다. 이 전략이 왜 필요한지, 왜 지금 우리가 변해야 하는지를 부장님께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김현우의 말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단순한 감정 대립이 아닌, 정면 돌파의 선언이었다. 그는 이미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부 PT—조직 내부를 설득하고 이 변화를 공식화하는 또 다른 무대가 열릴 것이었다
김현우의 뒷편에서 조용하고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이제 너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