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는 존재는 없다.

by Presentkim

나는 빨래 하는 것을 좋아한다. 젖은 빨래를 하나씩 털고 가지런히 널어두면, 혼자 마냥 좋다. 노래를 들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빨래를 털어 널 때, 그리고 갤 때 정리되는 그 기분이 가히 매력적이다. 이와 연장선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바로 건조기를 사용하러 가는 일이다. 우리 집엔 건조기가 없어 이불빨래 같이 크고 잘 마르지 않는 것을 말릴 때는 건조기를 이용하러 가야 한다.


작은 공간에 빼곡히 놓인 세탁기와 건조기를 보면 왠지 쓸쓸하지만 한편으로는 조용하고 좋다. 건조기는 10분에 1유로다. 보통은 10분에 다 마르지만, 가끔 2유로를 써야 할 때가 있다. 그 동안 나는 조용히 앉아서 기계만 바라본다.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이 없어진다. 일명 멍 때리기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빨랫감들이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준다.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고민들은 자취를 감춘다. 가끔씩 지루해질 때쯤이면 시계를 본다. 현실과 멍 때리기를 반복한다. 실제로 오래 멍 때린 것 같지만, 난 보통 1-2분 밖에 하지 못한다. 더 오래 하고 싶은데... 하지만 재빨리 시계를 보고 무엇을 해야 할지 걱정부터 한다.


하지만 그날은, 돌아가는 건조기 앞에서 든 어떤 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날은 스스로를 무거운 침묵 속에 가두었다. 난 인생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둔 적이 없다. 이왕 태어났으니, 삶에 대한 예의로 최선을 다해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다시 말하면, 내가 태어난 것에 대해 그렇게 기쁘지 않다. 사람들 앞에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유라도 있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다. 하지만 삶 전반적으로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생일도 챙기지 않는다. 남이 챙겨주는 것도 미안하기만 할 뿐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오던 내가, 그날은 건조기 앞에서 어머니가 해주신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머니께서 해주신 말에 의하면,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자세한 명칭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주 4.3 사건이 일어날 당시, 내 이모님은 외할머니와 함께 바로 옆 마을에 계셨고, 거리는 5분도 채 되지 않는다. 빨갱이로 몰려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동안, 돼지우리에 몸을 숨기고 계셨다고 했다. 무자비한 학살로 마을은 초토화되었지만, 다행인 건 옆 마을까지 죽이러 오진 않았다는 것이다. 이모와 외할머니는 그렇게 5분도 채 되지 않는 옆 마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생존하려 하셨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가 태어났고, 어머니가 결혼 후 나를 낳으셨다. 그때 외할머니와 이모가 ‘빨갱이’로 죽임을 당하셨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비록 ‘내’가 나를 의미 없다고 느낄지는 모르지만, 그 생명엔 언제나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말이다.


10분 타이머가 끝나는 소리에 생각에서 깼다. 건조기로 다가가 빨래를 꺼냈다. 빨래의 따듯함과 폭신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새삼스레 깨닫는다.

나는. 살아있다.

죽을 것 같이 힘들고 괴로워도, 허무해도, 방향을 잃고 방황해도, 의미 없는 삶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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