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 시작 할 때는 결혼하기 힘들거라고 그러더니
오페어 준비 할 때 나는 한국 나이로 이십 대 중반이었다. 어차피 1년만 다녀올 생각이었고, 신나게 여행도 하고 외국에서 지내다가 돌아와서 복학 후 나머지 4년 동안 논문을 열심히 쓸 생각이었다 (앞선 글 "미국을 오페어로 온 이유" 참고) https://brunch.co.kr/@c39a98fae8d84a9/4
한국에서 5년짜리 석박사 통합과정을 처음 시작할 때 나는 걱정을 많이했다. 전액 장학금 과정이라 정규직을 못 하게 되어있는데, 어떻게하면 먹고살까, 어떻게 하면 빨리 졸업할까, 논문은 뭘로 써야하나. 담당교수님은 "얘, 누가 너 공부하라고 돈을 다 내주니?" 하시며, 본인이 페이드 프로젝트 같은 거 있으면 너 생각해서 많이 불러 일 시켜 줄 테니, 돈 걱정 하지 말고 공부하라고 독려해주셨다. 아아, 나의 빛과 소금 같은 우리 교수님..
우리 교수님이나, 석사과정을 하고 있는 내 친구들이나, 선배님들은 감사하게도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내가 정말 놀랐던 것은, 왜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박사과정으로 인한 내 결혼 가능 여부에 대해 언질을 했냐는 것이다. 특히나 여성 교육자들이.
학부 4학년 말 쯤에 퇴직교원을 예정으로한 프로그램 조교를 했었다. 그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교육현장에서 20-40년을 보낸 초중고 교원들, 교장들이었다. 조교를 하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도 되어 석박사를 하려고 한다 했더니, 한 여성교감선생님이 여자는 결혼을 해야된다고 했다. 학교에서 어린이들 학생들 가르칠 때 그런 얘기(헛소리)를 하는 건가..? 프로그램 담당 교수님도 박사는 왜 하려고 하냐고 비관적으로 물었다 (본인도 박사학위가 있으신데 왜..?).
나는 그 때도,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아니, 그래 본인의 가치관이니 생각은 할 수 있지만. 교육자로서, 더 배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학생에게 어떻게 저런 말을 실제로 내뱉을 수 있는지 소름이 끼쳤다. 내가 아무생각 없어 보였던 걸까?
나는, 우리세대는, 열심히 공부하고 잘 자라서 성공해야 한다고 배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에서 17시간씩 공부하며 귀가 닳도록 듣는 이야기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좋은 대학교에 가고, 좋은 데 취직해서 성공해라" 였지, "단, 여자는 남자가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까지만 성취하고 결혼을 해야한다. 너무 성취하면 남자가 싫어한다"는 20대 중반이 되면서 처음 듣는 명제였다. 이게 뭐야? 왜 말이 달라?
그건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통합과정 시작할 때 엄마는 남자들이 가방 끈 긴 여자를 별로 안 좋아한다며 결혼하기 힘들거라고 했다. 엄마는 큰 뜻 없이 툭 던진 말이었고 나는 내가 가방끈 길다고 싫다는 놈이면 내가 미쳤다고 같이 사냐고 했다. 아니, 엄마까지 이런 소릴 한다고?
이후에 미국에 1년 다녀오겠다고 오페어 준비를 하고 떠날 때가 되자, 엄마가 이번에는"그 먼 미국까지 가야겠니? 그냥 한국에서 박사과정 다니면 안돼?" 라고 했다. 나는 웃음이 났다.
글쎄, 돌아보면 엄마가 걱정한다고 툭툭 던진 말에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엄마는 모른다). 내가 공부를 포기하고 내가 그보다 가방끈이 길지 않기 때문에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 하라는 대로 하고 살기를 바란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부모님은 언니와 내가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전후 세대인 우리 부모님은 모두 본인의 공부를 포기하고 일을 하면서 가족들을 먹여살리고 동생들의 학비를 댔다. 결혼하고 나서는 자식들은 더 많이 배우라고, 더 잘 살으라고 열심히 일하고 뒷바라지했다. 부모님의 그 노력을 우리가 모를 리가 없다. 우리는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싫은 것도 했고 상처받아도 티내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속상해 할 테니까. 우리 가족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성실히 살았다.
문제는, 언니와 내가 대학을 진학한 시점에서 엄마와 아빠가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가 펼쳐졌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엄마아빠는 언니의 대학생활에 제약을 많이 두었다. 언니는 어느 정도 그 선 안에서 말을 잘 들었다. 그 흔한 엠티도 잘 안 다녔고, 통학버스때문에 술자리도 잘 못갔던 것 같고, 외국으로 배낭여행을 간다고 얘기도 꺼낸 적 없고, 자취는 커녕 기숙사에 지내겠다고 한 적도 없다. 졸업하고 취직해서 직장에 잘 다녔다.
문제는 나였다. 언니와 나이차가 많이 나 언니가 졸업하고 난 후에야 내가 대학에 갔다. 나는 성인이 된 후 초반엔 언니처럼 말을 듣는 듯 하다가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시작했다. 번 돈을 집에 안 갖다주고 내가 모으기 시작했고, 먼 외국으로 여행과 연수를 가겠다고 했고, 박사과정을 하겠다고 했고, 이번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아예 살다 오겠다고 했다. 샌프란시스코는 헐리웃 영화 더 락에서 숀코넬리와 니콜라스케이지가 추격신 할 때나 본 곳이었다 (대문사진이 영화 더락 씬). 부모님의 허락이나 재정이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부모님이 제동을 걸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을 잘 하겠다고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게 자랑스러우면서도, 엄마 아빠는 카더라로 들어만 보던 것을,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데를 겁도 없이 간다는 이놈의 딸래미의 미래가, 정확히는 그들이 경험하지 않았던 세상이 두려웠던것 같다.
공항에서 떠나는 날, 엄마 아빠가 들어가는 데 까지 바래다 주었다. 잘 조심히 갔다오라고, 같이 사는 가족이 못되게 굴면 당장 돌아오라고 했다. 얼굴에는 아쉬움이, 걱정이 역력했다. 나는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그래봐야 1년인데 어휴 웬 난리냐고 손사래쳤다. 왜 내가 아예 가버리는 것 처럼 저렇게 안타까워하는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억지로 웃으며 손 흔들며 들어갔다. 엄마 아빠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서서 손을 흔들었다.
1년만 있다 들어가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렇게 손 흔들어 인사하고 나서 내가 한국을 다시 방문한 건 4년 반 후였다. 생떼같은 내새끼를 어딘지도 모른 곳에 보내는 마음은 어땠을까. 분명히 삐약삐약 거리면서 바지색깔 맞춰 머리띠 색깔 고르던 때가 엊그제 같았을 텐데.
다른 작가들의 글을 보면서, 비슷한 마음을 많이 느낀다. 한국의 20세기에 나고 자라면서, 전후세대와 일제시대 잔재 속 오래된 관습 및 "어른"들의 가치와 나의 정체성 사이에서 방황하고, 좌절하고, 울부짖다가 마침내 그 복잡한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사람들. 마침내 소리지르며 맞서 싸우고, 용서하며 더 나은 나를 위해 발전할 수 있게 된 그 마음들. 이제야 하고싶은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어른들은 애도 안 낳고 세상이 글러먹었다고 한다 (잠깐! 공격하지 마시라 나는 애 낳아보고 싶으니). 터놓고 말해서, 침략에, 전쟁에, 독재에, 경제위기에.. 세상은 언제나 글러먹었었다. 그나마 언제나 누군가는 열심히 살고 목소리 높여 옳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고 발전한다. 내가 나이를 먹고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똑같이 편협하고, 겁 많고, 내 말이 맞다고 우기는 사람일텐데. 어떻게하면 그나마 헛소리를 덜 할 수 있을까. 어떻게하면 아이들이 무럭무럭 길러온 자신의 믿음대로 뻗어나갈 수 있게 토대를 닦아주는 교육자가 될 수 있을까. 내가 경험하지 않은 세계에 대해 더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교사들을 길러낼 수 있는 멘토가 될 수 있을까.
앗, 아직도 오페어 출발을 안했다! 이러다가 출발 전 이야기로만 책이 나오게 생겼다. 얼른 출발을 해야지 할 얘기도 많은데.
오페어로 출발하는 비행기편은 에이전시에서 주고, 입국시 필요한 서류도 모두 준비해준다. 가방은 너무 많이 쌀 필요 없다. 막상 살다보면 내가 생각한 날씨와 스타일과 달라서, 한국보다 특정 브랜드가 저렴해서, 혹은 퇴근 후 콧바람 쐬는 용으로 옷을 많이 구매하게된다.
도착 후 첫 3일 정도는 오페어에이전시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해야 했고 오페어케어 같은 경우는 뉴저지였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면 그 때 자기 호스트패밀리 집으로 이동하는데 호펨이 차로 데리러 오는 게 아니라면 미국 국내선을 타면서 짐을 또 다시 붙여야 한다. 한국->미국 국제선때는 수하물 2개 붙이고 캐리온 한개 + 개인가방까지 총 4개가 무료지만, 미국 국내선을 탈 때는 캐리온 하나와 개인가방 하나만 무료고 나머지는 추가 요금을 내고 붙여야 한다. 같은 공항에서 항공편을 이용한 2-3명은 공항 한가운데에서 다시 짐을 다 펼쳐놓고 두개의 가방안에 무게리밋에 맞춰 낑겨넣느라고 난리를 쳤다.
미국 공항은 한국처럼 친절하지 않아서, 잘 몰라서 어버버 거리고 있으면 소리지른다. 나는 가방을 키오스크로 붙이려고 시도했는데 카드만 사용 가능했다. 신용카드 안가지고 왔는데.. 한국에서 가져간 아멕스 하나 체크카드? 가 결제가 안 될까봐 불안에 떨었다. 창구로 가서 직원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키오스크로가서 하라고 소리만 질렀다 ㅠㅠ 어찌어찌 결제가 되어서 다행이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크레딧카드만 받는 곳도 많으니 미국에서 쓸 수 있는 비상 크레딧카드는 꼭 가져가길 바란다. 그리고 짐은 제발 적당히..
어찌됐든 오리엔테이션에는 100-200명 쯤 되는 젊은 청년들(대체로 여자애들)이 모여, 기본적인 안전교육이나 보육방법을 수강한다. 한국인 특성상, 세상에 나보다 잘 알고 잘 하는 사람은 넘친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왔다면, 갖다 버려라. 왜냐면 내가 곧 갖다 버렸으니까.
오페어 관련 궁금하신 분들께서 질문을 주시곤 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채널을 개설해보았습니다.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편하게 이야기 나누어 보아요. - 하이데어 멘토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