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것은 어디에서나 나온다. 예를들면 맛있는 것
스위스에서 먹은 이야기는 1화-스위스 외식비 안 비싼데 에서도 했었다. 다만, 스위스에 도착해서 하루가 거의 지난 이 시점까지는 아직 그렇다할 식장에서 밥을 먹은 적은 없는 상태였다. 첫날 저녁엔 팝콘 사다 먹었지, 아침에는 빵 사다 먹었지. 그러고 만보도 넘게 걸어다녔으니 진짜 식사가 시급했다.
일단 트라이포인트를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였던 쿤스트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바젤카드' 덕분에 시내 교통비가 무료이니 좋았다. 이 샌프란시스코 촌년은 버스와 트램이 제시간에, 빠르게, 효율적으로 움직이는게 다 황홀할 지경이었다.
가는 동안 구글맵으로 박물관 근처에 아무리 식당을 찾아도 괜찮은 곳이 눈에 안 들어왔다. 그래도 도착하면 뭔가 있겠지 했는데 역시나 별게 없었다. 일단 남편이 엄청 보고싶어했던 전시를 먼저 보기로 했다. 댄 플라빈 이라고 하는 예술가의 특별전시. 이 박물관 역시 바젤카드가 있으면 할인이 되니 참고하시라.
댄 플라빈은 한마디로 말하면 '형광등 예술가'다. 쉽게 구할 수 있는 형광등을 이용해 미니멀리즘과 모더니즘을 표현했고 살아생전에도 유명했던 모양이다.
어떻게보면 그냥 형광등을 모아 여러 색으로 나열해 놓았을 뿐인데, 빛과 색이 퍼지는 모양, 명암, 거리가 공간 자체와 만나면서 새로운 느낌을 창출한다. 이 전시에서는 실내가 미니멈으로 하얀 벽과 천장이었지만, 다른 작품에서는 공간의 형태 자체를 이용한 경우도 많았다.
우리는 흔히 새삼 엄청난 것을 연구하고 사용해야지만 최선의 예술이나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지지 못한 상황을 한탄한다. 부모가 돈이 많았으면 좋겠고, 내가 돈이 많아 내새끼한테 넘겨줄 게 많았으면 좋겠고, 스위스에서는 그 물가와 이름에 걸맞는 맛있는 비싼 걸 먹었으면 좋겠다고.
허나 대단한 것은 대단히 기대한 것에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영화 ‘라따뚜이’에서 "모두가 멋진 셰프가 될 순 없지만 멋진 셰프는 어디에서나 나올 수 있다"라고 했듯이. 플라빈의 형광등 아트가 그랬고, 배가 고파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 만난 미술관의 식당이 그러했다.
다른 전시 - 일본 무슨 시대 그림을 모아놓은 전시관을 대충 둘러봄 -는 볼 여력이 없었다. 주위에는 괜찮은 식당이 없었고, 마지막 남은 선택지는 박물관에 위치한 식당, 'Bistro' 였다. 박물관 건물은 또 3개나 되어서, 식당을 가려면 이 건물을 나가거나 지하도로 건너가야 했다. 벌써 두시가 다 되어갔다.
레스토랑은 굉장히 길-었다. 내부는 깔끔했고 사람도 꽤 많았다. 일단 앉아서 메뉴를 봤다.
독일어가 크게 써있어서 눈이 휙휙 돌아갔지만, 자세히 보면 영어도 써 있다. 이거 말고도 메뉴가 더 많은데 요만큼만 필요하다. 왜냐면 여기서 다 시켰으니까.
스위스에 와서 처음 먹는 진짜 식사이니 두근두근했다. 어떻게 시켜야 하나 고민고민하다가 런치 세트메뉴(?) 처럼 보이는 걸로 정했다. 'MITTAGSMENU' 를 주문하면 25프랑에 그린샐러드 + 메인메뉴 택1 요렇게 나오는 것 같아서 나는 치킨으로 했다. 남편은 Flammkuchen, 영어로는 플람베라고 써있는 베이컨 들은 걸 시켰다. 내 건 샐러드도 나오고 밥도 나오니까 남편이랑 같이 먹으면 좋을 거 같았다.
샐러드를 먼저 줘서 먹으면서 주변을 구경했다.
서버는 세 명이었다. 나이드신 아저씨, 젊은 남자분, 젊은 여자분. 우리 담당은 아저씨셨는데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곧 젊은 남자분이 와서 주문이나 여러가지를 도왔다. 이 사람을 구경하고 있자니 여기저기 테이블을 다니면서 전부 다른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나중에 물으니 3개국어를 한다고 했다. 유럽사람들은 이런 이득이 있구나- 좋겠다- 하고 있던 차에 음식이 나왔다.
나중에 알고보니 플람구첸(영어로 플람베라고 써있던 것)은 아주 얇은 피자 같은 거였다. 불에 구워내서 플람베라고 하나
엄청 커 보이는데 사실 엄청 얇기도 해서 양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오오 이게 바로 내가 시킨 치킨. 구운 가지, 주키니, 토마토, 파프리카 등등 채소에 구운 치킨이 올려져 있고 티카마살라소스가 끼얹어져 있었다. 제일 위에 꽂은 건 바삭한 트윌 같은 것.
아- 이게 정말 맛있었다. 스위스에서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었다. 구운 채소, 특히 가지는 달콤하고 채즙이 팡팡 터졌다. 잘 구운 닭 허벅지는 부드러운데 감칠맛이 돌았다. 티카마살라 (커리같은 것)가 풍미를 더했고 바스타미 쌀 밥과도 잘 어울렸다. 그냥 런치메뉴인 줄 알고 시켰는데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지?
다 못 먹을 것 같았는데 말끔하게 비웠다. 남편 플람쿠첸도 맛이 있긴 했는데 나는 그저 채소, 쌀, 닭고기, 커리의 조합에 정신을 놓고 마지막 한 입 까지 정성스럽게 먹어치웠다.
25프랑에 이정도라니? 샌프란시스코라면 세금/팁/SFmandate가 붙기 전에는 19불 정도여야 하는데, 19불에 이정도 퀄러티의 메인메뉴 + 샐러드 + 밥이라니 어림도 없다.
부른 배를 둥둥 두드리며 나왔다. '대단한 것은 어디에서나 나올 수 있다'가 우리가 보러 간 예술가 '플라빈'의 철학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예술이란 건 모두의 해석과 감명이 다르지 않던가. 이 맛있는 식사가 '식당(Bistro)' 이라는 정직한 이름의 장소에서 나온 것 처럼. 플라빈의 형광등이 색과 명암으로 공간을 울린 것 처럼. 그럼 됐지 뭐.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글을 맺고 싶은데, 아직도 하루가 안 끝났기 때문에 조금 더 써야한다.
밥을 먹고 우리는 도시를 더 돌아다녔다. 'Basler Münster'라는 오래 된 성당이 있는 언덕 위에서 강가도 바라보고, 언덕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문제는 내 왼쪽 무릎이었다. 아침부터 심상치 않게 덜그럭 거리더니, 이제는 굽힐때 마다 통증이 몰려왔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문제는 오늘 골라 입었던 의상에 있었다. 무릎까지 컷이 있는 미디 청치마를 입고, 추우니까 안에 레깅스를 신었다. 그런데
1. 레깅스와 청치마는 텍스쳐의 마찰로 인해 허벅지의 보폭을 작게 만드는 동시에 힘이 더 들었고,
2. 컷이 무릎 즈음 부터 있으니 무릎 위는 폭이 적어 보폭에 제한이 더해졌는데
3. 그 와중에 빨리 걷겠다고 보폭을 팍팍 차서 걸으니 치마 폭에 걸려 무릎이 위쪽으로 꺾여오며 무리를 줬던 듯 했다.
바젤은 언덕이 많은 도시였다. 둘러보니 우리 엄마 또래 방문객들이 등산스틱을 들고 다니는게 많이 눈에 띄였을 정도였다. 숙소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첫 날부터 다리를 망가뜨리다니.
남편은 쉬다가 잠이들었다. 나도 피곤했는데 시차를 맞춰야 하니 버텼다. 창문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멍을 때렸다. 옆 예술대학으로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드나들었다.
남편이 낮잠에서 깼다.
무릎따위가 나를 막을쏘냐, 우리는 또 또 다시 나왔다 ㅋㅋㅋㅋㅋㅋㅋ 강을 건너 이리 저리 걷다가, 배를 타보기로 했다. 4월 말엔 비수기라 탈 수 있는 페리 종류가 없었는는데, 하나의 선택지가 남아있었다.
라인강 곳곳에 다리를 건너는 나룻배(?) 가 남아있다. 얘는 동력이 따로 없이 줄로 연결되어 있고 정말 강만 건너주는데, 그래서 그런가 2프랑인가 어쩐가 저렴하다.
저 줄을 타고 건너간다. 우리가 갔을 땐 직원분이 친구(?) 지인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지인은 1살, 4살쯤 되어보이는 아이 둘과 그냥 보트 위에 앉아서 손님이 오면 강을 이리저리 건너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는 보트를 이제 너무 많이 타 봐 재미가 없는지, 들고 있는 감자칩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한가로웠다. 한강만큼 크지는 않지만 넉넉히 흐르는 강. 저 멀리 파란 하늘이 보였다. 관광페리를 타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요즘말로 럭키비키 (후훗)
내려서가 문제였는데, 이 루트는 공사중이라 올라가는 길이 다 계단이었다.. 내.. 내무릎.. 남편을 붙잡고 천천히 올라가느라 애를 먹었다.
저녁은 1화에서 다뤘던 슈니첼을 먹었다. 가격대가 좀 있긴 하지만, 로컬 아저씨들이 시끌벅적한 곳이고 마음에 들었다. Schnabel 이라는 곳이니, 궁금하신 분께서는 들러보셔도 좋겠다.
무지하게 길었던, 22000보 가까이 걸었던 바젤에서의 2일차가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