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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io Library Jul 07. 2024

융프라우 곤돌라 전세냈다

돈 한 푼 더 안 들이고

여행계획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에 MBTI 인 듯 하다. MBTI는 먼 옛날 학부때 양육자/영유아의 기질적합성을 다루면서 잠깐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고 등장했 던 걸 봤던 게 처음이다. 사람을 딱 구획대로 나눈다기 보다는, 각자 사람의 복합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해하면 양육자가 '나에게/혹은 아이가 문제가 있다' 라는 부정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액션을 취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MBTI는 내가 미국에 온 이후에 급격히 유행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혈액형 별 성격테스트' 만큼이나 용한(?) 물건이 되어 있었다. 남보다 앞서 알았지만 유명해진 이후에는 괜한 심보로 그 흔한 MBTI 테스트를 한 번 도 안 해 본 나는, 누가 내 MBTI는 뭐냐고 물으면 뚱한 표정으로 모르는디용..(?) 할 뿐. 다만 남들이 MBTI를 가지고 나누고 싸우는 걸 보는건 재밌다. 제일 많이 싸우는 건 여행갈 때 J냐 P냐 같았다.



아마 몇 년 전의 나는 굉장한 J였나보다. 여행을 간다고 하면 학교 수학여행이나 회사 연수처럼 빡빡하게 일정을 짰다. 어디를 갈 것인지,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할 것인지, 이동 거리와 시간은 얼마인지, 어떤 식당에 가서 어떤 메뉴를 먹을 것인지를 다 정했다. 미리 구글 맵이나 지도나 이런 걸로 어디에서 어떻게 내려서 우회전을 하고 좌회전을 하고까지 다! 일정을 짜는 건 재미있었고, 그 계획이 실제로 시행 될 때 짜릿했다! 새로운 곳에 교통편을 타고 내려서 길을 찾아갈 때, 시간이 딱 맞아떨어질 때의 그 쾌-감! 크으- 여행이란 자고로 계획을 짤 때 가장 설레는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 요상하다. 인생에 정해진 J게이지 양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는 진정한 트루 J가 아닌 것인지. 아니면 예상외로 길게 살게 된 외국생활과 그로 인한 여행들이 원인인지 콕 찝어 말할 수는 없으나, 이제는 잘 모르겠더랬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고, 내 손을 떠난 것이 있는데, 굳이 그걸 다 붙잡겠다고 여행 계획을 미친듯이 짠 후에 그래도 안 된다고 난리를 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번이 바로 그랬다. 4월말 융프라우의 쨍쨍한 푸른 하늘은 웃돈을 주고도 못 사는 프리미엄 가챠박스의 레어템 같은 것. 내가 미리 일정을 짠다고 하는 건 대자연과는 아무렁시롱 상관이 없는 일이므로, 우리는 빠르게 뇌 두개를 굴렸다. 언제 어떤 기차/케이블카가 문을 닫는가 - 갔다가 내려오는 것 까지 얼마나 걸리는가. 다행히 새로 생긴 아이거 익스프레스 곤돌라는 아이거플레쳐 (융프라우 꼭대기 전 역)까지 가는데 편도로 한 시간도 안 걸렸고, 다른 노선들은 문을 닫을 시간에 얘는 운행시간도 6시인가 정도로 꽤 길었다. 그래, 아이거 익스프레스를 타고 올라갔다 오자!



하고 호기롭게 출발했는데 그린델발트 기차역으로 오자마자 결정장애에 직면했다. 아이거익스프레스는 정확히 말하면 '그린델발트' 역이 아니라 '그린델발트 그룬드'라는, 기차로 한 정거장 전에 위치했다. 버스도 가는 노선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기차도, 버스도 배차 텀이 30분이라는 것. 이미 4시를 넘어가는 상황에서 30분을 기다리는 건 너무 길었다.


"It takes only 19min walk though, what would you like to do?"

(걸어서 19분 밖에 안 걸리는데 어떻게 할래?)


19분은 물론 걸을 만 하지. 문제는 이미 고장나 덜그럭 거리는 나의 왼쪽 무릎 (무릎 나간 얘긴 여기).. 나는 뭔가 찜찜한 얼굴로 "We will walk then(그럼 걸어 봐)" 하고 걷기 시작했다.



그냥 도로려니 했다. 그런데 웬걸, 지도는 우리를 아기자기한 오솔길로 안내했고 아니 세상에 말도 안되게 귀여운 풍경이 펼쳐졌다.





 

짐을 왜 다 동동 지고 다녔나 모르겠다.


어멋, 이 초록초록한 들판과 노란 꽃들, 작은 집들 (아마 대다수는 샬레나 베케이션홈이겠지만), 푸른하늘에 눈 덮인 산이 배경으로 가득 찼다. 오솔길을 따라 비탈길을 구불구불 내려가는데, 다리를 굽힐 때 마다 왼무릎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 내가 스크린세이버 이미지에 들어와있는데 무릎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경사가 꽤 있는 길이 나오면 나는 남편을 앞에 세우고, 눈은 풍경에 고정 한 채 사람지팡이를 짚으며 가로로 내려갔다.




연신 사진을 찍어대며, 우리는 걷길 참 잘 했다고 희희낙낙거렸다. "여기 사람들은 다 엄청 걸어야겠어. 차가 하나도 못 들어와" 나 "잔디 관리는 어떻게 하나" 같은 지극히도 미국인스러운 농담을 해 대면서.




내 무릎 때문에 아마 20분보다 좀 더 걸렸을테지만 곧 아이거익스프레스 역에 도착했다. 케이블카만 아니면 여기를 연신 걸어다녀도 좋겠다 싶었다.


케이블카 역은 새로 지어 삐까뻔쩍한 것은 그렇다고 치고, 정말로 사람이 없었다. 가자마자 그냥 스무스하게 바로 탔는데, 몇십인용은 되는 커다란 곤돌라에 덜렁 우리 둘 뿐이었다!



 곤돌라는 묵직하고 스무드하지만 빠르게 움직였고 엄청난 뷰를 선사했다. 아무도 없다니! 졸지에 인기있는 곤돌라를 전세낸 마냥, 우리는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360도로 뷰를 감상했다.


공짜로 전세를 냈으니 거만하게 자세를 취해본다


올라갈 수록 초록잔디는 점점 사라지고 눈과 침엽수만이 빽빽하게 보인다. 혹시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를 보셨나 모르겠다. 마지막 10분여간은 그 영화에서 빰빰빠- 빰빰빰 음악 깔리고 호빗네들 쌩고생 하며 넘는 장대한 뉴질랜드 산능선 현실버젼. 눈 덮인 산 정상을 미끄러지듯 날아 눈 앞에서 아이거가 떡 하니 나타나는데, 이게 진짠가 싶다.



아이거글레쳐까지는 정말 금방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던 대로, 막상 꼭대기로 가면 갈수록 날씨는 더 격해져 뷰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래서 꼭대기를 가는 건 뺐던 것이 퍽 괜찮은 결정인 셈이었다.



한국사람들이 부르는 '북벽이'. 참 이름도 잘 짓는다. 귀엽게 눈이랑 입이랑 팔다리 달렸을 것만 같은 이름.



곰곰히 생각해보면 오늘 아침만 해도 바젤에서 출발을 했다. 오늘 하루 생각해 놨던 계획이라하면

1. 바젤에서 인터라켄 감

2. 체크인하고 패스 삼

3. 패스로 어딘가를 올라감 (아마도 피르스트?)

요게 다였다.


어차피 세상은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우리는 그 때 그 때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계획을 틀었고 발을 내달았다. 트로티바이크를 못 탔다고 슬퍼하면서 그냥 내려갔더라면, 혹은 그린델발트에서 그린델발트 그룬트까지 시간이 안 맞는다고 안 갔거나 기차를 탔더라면, 우리는 눈 덮인 산과 하늘을 배경으로 노란 꽃이 가득 핀, 오밀조밀 모인 집들이 가득한 동화같은 오솔길을 놓쳤을 것이고, 공짜로 전세낸 아이거익스프레스도 못 타봤을 것이다.


그 어떤 것을 놓치지 않고자 계획에만 몰두한다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놓칠 수도 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가다보면, 다음에 언제라도 기회가 있는 것. 13년 전 스위스에 왔을 때 내가 다시 여기 올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것 처럼.



아아 아이거글레쳐는 너무 추웠다. 여름에는 여기 하이킹도 할 수 있고 한데, 뭐 바람이 너무 씽씽 불고 눈이 가득 쌓여서 거긴 당연히 막혔다. 저 때는 시간도 꽤 늦어서 스키나 보드를 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사실 꼭대기를 안 가고 스노우 스포츠도 안 즐기면 겨울엔 별로 할게 없는 곳.. 차가운 바람에 따귀를 맞고 양쪽 허파를 새파란 공기로 한껏 불어넣은 후에야, 우리는 "아유 추워 아유춰" 하면서 실내로 들어와 내려오는 곤돌라를 다시 탔다.



벌써 5시가 넘은 시각. 빨리 움직여야했다. 인터라켄으로 내려가는 데만 1시간 반은 걸릴텐데, 7시에 미슐랭 레스토랑 예약이 있었기 때문에. 아휴 지난 일인데도 글 쓰면서 다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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