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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io Library Jul 12. 2024

맛있는 건 정말 참을 수 없어

모든 재료는 50km 이내에서

"오늘은 뭐 먹지?"


여행가서 가장 신나는 것 중 하나는 먹는 것. 자, 다들 솔직히 터놓고 말해봅시다. 여행지에서 그 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을 먹는 건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요!


우리도 여행지에 가면 그 동네에서 맛난 걸 찾아다니는데, 남편과 나는 다만 결이 다르다. 나는 로컬 음식은 동네사람들이 자주 가는 작은 개인음식점에서 먹어야 한다는 주의라고 치면, 남편은 파인레스토랑이야말로 그 분야에 정통한 셰프가 연구를 거듭해 실험정신을 맛볼 수 있다고 믿는다.


데이트 할 때는 멋 모르고 남편따라 파인다이닝을 다녔다가, 결혼을 하고부터 내가 제동을 걸어서 빈도가 뜸해졌다. 처음에는 서로 이해를 못했다. 둘이 어떻게 사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몇 년 동안 서로를 물들이면서 좋은 쪽으로 합의를 봤다고 생각한다.


처음 남편을 한국에 데려왔을 때, 생전 처음 아시아 국가에 와 본 남편은 아무래도 이런 저런 음식을 접하는 게 꽤나 도전이었을 것이다. 나는 남편을 잘 달래서 서울 먹자골목을 데리고 다녔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그냥 들어간 삼겹살 집에서, 나는 아직도 남편의 설레는 얼굴을 잊지 못한다. 사람으로 북적북적 시끄러운데 재빠르게 나오는 반찬들. 빠르게 달궈진 불판에 구워주는 두꺼운 삼겹살. 남편은 이런 이국적인(?) 진짜 경험에 깨나 행복해 했다.


그리고 나는 남편이 원하는 대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도 갔다. 미국에서만 다니다가, 한국에서 나고 자랐는데 한국에서 파인다이닝 미슐랭 한식은 나도 처음 먹어봤다. 많은 미국인들이 그렇듯이 잘 못먹던 해물도 남편은 거기서는 한 입거리로 조금씩 나오니까 잘 먹었다. 분위기도 좋고, 맛있고 쨍한 보라색 립스틱에 사진도 잘 나와서 우리는 거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평소에는 동네의 작은 레스토랑을 찾고, 특별한 날엔 파인다이닝을 가기도 한다. 남편은 내 덕분에 함께 작은 로컬가게들에 매력을 느끼게 됐고, 나는 여행지에서 한 번 쯤은 고급 파인다이닝레스토랑을 즐길 줄 알게 됐다.




이번 여행에서도 계획 때 부터 남편은 스위스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찾았다. 파인다이닝은 캘리포니아 느낌이 물씬 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건 집 근처에도 많으니 두 세 번을 가자고 하는 걸 하나로 막았다. 이 레스토랑을 찾고 예약을 한 다음, 마음에 들었던지 기분 좋게 자기가 쏘겠다고 했다.


인터라켄에 위치한 Radius라는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 유명한 셰프인 듯 하다.

https://guide.michelin.com/en/bern-region/interlaken/restaurant/radius-by-stefan-beer


이 곳의 특징은 엄격하게 모든 재료가 반경 50km내에서 나는 걸 사용한다는 것! 그야말로 로컬 음식이 아니겠는가. 테이스팅 메뉴는 이미 정해져 있는데, 본인 식성에 따라 식물성 코스로 고르거나 혹은 캐비어/추가메뉴를 더할 수 있다. 물론 메뉴는 매번 바뀜.



황급히 융프라우에서 내려와서 옷을 대충 갈아입고 레스토랑까지 걸어갔다. 어우, 피곤했다.


걷는 데 후터스가 보였다. 솔직히 13년 전 인터라켄에서 기억나는 건 굉장히 한정적인데 그 중에 하나가 후터스의 주황주황한 인테리어ㅋㅋㅋ 점심때를 놓쳐 뭘 먹으려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 아무데나 연 곳을 들어가 뭘 시켜 먹었다. 직원 분들이 굉장히 몸매가 좋고 탱크탑을 입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거기가 후터스였던 것. 그 땐 몰랐지만 후터스는 미국에서 기름진 패스트푸드와 함께 몸매좋은 직원들 구경하러 가는 (..) 독특한 패스트푸드 체인이었다. 스위스까지 가서 후터스 가서 감튀 먹었다고 하면 미국사람들이 다 놀릴 것.. 이었는데 그 땐 몰랐지ㅋㅋㅋㅋ 그 땐 손님이 우리뿐이었는데 후터스가 미어터지는 걸 보고 남편과 떠들었다.

 

"왜 여기까지 와서 후터스를 가지?"

 "뭐, 나도 13년 전에 갔었어서 할 말은 없는데.. 고향의 맛(?)이 그리운가?"

고향의 맛이 웃겨서 둘이 낄낄 웃었다.




우리의 레스토랑은 빅토리아호텔 1층에 위치해 있다. 역시 사진을 안 찍는 나. 호텔 정원 외관이라 굉장히 예쁜데 사실 뜰쪽 입구로는 들어갈 수 없고 호텔 정문을 통해 들어가야한다.


내부가 정말 아름다운데 또 사진이 없음. 직원이 기분 좋게 자리를 안내해 주시고 앉자마자 기분 좋게 샴페인을 한 잔 하겠냐고 권한다. 그래서 까짓거 한 잔 받았다. 두 가지 중에 고르라고 해서 각각 하나씩 골랐는데, 나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남편이 알아봤다.


"이거 우리 전에 먹어본 건데, 너 이거 엄청 좋아했었어"

"그래? (한 모금 꼴깍) 음! 엄청 마음에 들어!"


입맛 참 한결같은 듯.

 아, 물론 무료는 아니고 나중에 가격이 따로 붙는다 (얼마라고 얘기 안 해 주니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거절하시는 게 좋겠다). 다만 샌프란에서 이런 고급 레스토랑 샴페인은 한 잔에 30불 이상 하는 반면에 여기서는 22프랑인가 (25불 쯤?) 해서 또 이득이었다는 이야기.



기분 좋게 어뮤즈부쉬 (식전 한입거리)를 갖다주고 보라고 메뉴도 갖다준다.

맛있어.. <3


보면 캐비아 추가하면 260프랑, 캐비아 없이는 195프랑. 와인페어링을 더하면 120프랑이 추가다. 우리는 캐비어에 미련이 없고 여기서 술 더 마시면 바로 뻗을 것 같아서 그냥 기본메뉴로 시켰다. 메뉴와 가격은 매번 바뀌니 주의.




여기까지 에피타이져. 에피타이져가 전부 정말 맛있었다! 조금씩 맛있는 걸 여러 개 먹는 것 만큼 행복한 게 있을까!



이 둘은 메인코스.

전체 코스중 나의 최애는 왼쪽에 있는 초록 컵 같은 것. 짭잘한 다싯물-허브 갈릭소스에 스모키하고 부드러운 양고기 조각이 들었다. 하얀 건 온센달걀인데, 저 달걀을 깨서 노른자+양고기+소스를 먹으면 극락! 마음 같아선 저것만 한 대접으로 먹고 싶었다.


반면 오른쪽의 송아지 요리는 전반적으로 쏘쏘. 일단 여기까지 배가 꽤 부르기도 했고, 베이스로 깐 소스가 '김치'를 이용한 건데 간이 셌다. 버터를 많이 넣고 약간 그레이비처럼 만든 소스였는데, 뭐랄까 유능한 통통튀는 신입(김치)이 들어왔는데 신입을 잘 살려 팀에 넣어보려고 하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중고대리가 된 느낌.



이제는 디저트. 개인적인 호불호가 있었다. 왼쪽 걸 남편은 아주 좋아했는데 내 입맛에는 오른쪽 게 더 맛있었다. 데코레이션이 굉장히 정교해서 먹기가 아까웠음.




이쯤 되자 너무 피곤하고 배가 불러서 식후 차나 음료를 더 하겠냐는 제안에 우리는 재빠르게 손사래를 쳤다. 얼른 가서 씻고 눕고 싶었다  (9화, 10화, 11화가 아직도 다 하루다). 직원은 계산서와 함께 식후 마지막 디저트를 또 가지고 왔다. 우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었다.




아마도 파인다이닝 후식으로 나오는 petit four 비슷 한 건데, 개인적으로 나는 메인 디저트보다 얘들이 더 내 취향이었다! 저 과학실험실 실린더처럼 생긴건 도수가 낮은 디저트 칵테일. 달콤하고 재밌고 감질맛 나서 마음에 들었고, 작은 디저트 하나 하나가 완성도는 물론 맛의 조화가 정말 좋았다. 맨날 달아서 이가 빠질 것 같은 미국 디저트만 먹다가 단맛이 조화로운 유럽디저트를 먹으니 행복할 수 밖에.








2시간 정도를 먹고 다시 숙소를 향해 걸었다.


남편은 자기가 찾은 레스토랑이라며 어깨를 으쓱 했다. 남편에게 잘 먹었다고, 레스토랑을 찾아주어 고맙다고 했다. 레스토랑에서는 셰프의 이런저런 얘기와 레시피가 써 있는 고급 잡지를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해서 챙겨왔다. 어둑해진 인터라켄의 거리에는 아직도 사람이 좀 있었지만 낮 보다는 한산했다. 두런두런 얘기를 하며 이미 만 7천 보를 달려가고 있는 걸음수를 채웠다.


"이거 근데 레시피 있어도 우리가 만들수 없는 거 아냐? 스타 세프가 인터라켄 50km이내 특산품들을 쓰는데 그걸 우리가 어떻게 구해?"

"아냐, 할 수 있을 거야"

"아닌데- 막 무슨 인터라켄 XX농장에 있는 45일 된 송아지의 꼬리 이런 거 필요할 거 같은데ㅋㅋㅋ"

"아냐 그래도 챙겨갈거야"


내가 말해도 남편은 철벽방어를 하며 잡지를 챙겼다. 뭐, 그래 기념품이고 좋지.


아, 물론 레시피는ㅋㅋㅋㅋ 예상한 그대로였다. 만약 만들려고 한다면 그냥 홀푸즈 (미국 마트체인)에서 "소고기 주세용" 해서 써야겠지.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고 프렙 자체를 할 수 있는가ㅋㅋㅋㅋ


벌써 여행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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