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13년 전 융프라우에서 미아될 뻔 한 썰
다시 스위스 여행가면 반드시 해 보고 싶었던 것.
내 방문을 딱! 열면 눈이 내려앉은 산과 폭포가 보이는 거.
일단은 어느 동네에 머물까도 고민을 했는데, 계속 돌아다녀야 하니 교통 기점인 그린델발트와 라우터브루넨이 후보지였다. 그린델발트는 인터라켄 다음으로 복작복작 스러운 느낌이어서 그나마 좀 덜 해 보이는 라우터브루넨를 골랐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가격이 적당하고 뷰가 좋은 오래된 샬레 종류는 오직 모던디자인을 외치는 남편을 통과하지 못하고, 남편을 만족시키면 가격이 올라가는 게 인지상정.
그러다보니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한 것이, 융프라우에 묵는 3박 중에서 이틀은 인터라켄에서 묵고 하루는 돈을 더 쓰더라도 뷰가 좋은 호텔과 방을 잡자는 안이었다. 다행히도 비수기였기 때문에, 예약 가능한 숙소도 많고 가격도 훨씬 저렴했다. 며칠 간을 씨름한 끝에 골랐던 곳은 Hotel Silberhorn https://maps.app.goo.gl/ev4WbV8E8sPwf3vE7
라우터 브루넨 역과 뮤렌으로 가는 케이블카역 바로 옆!에 위치한다. 지금 찾아보니 뷰가 좋은 방은 다 나가서 가격이 뜨질 않는데, 4월 비수기에는 지금 2인용 일반 방 가격에 좋은 뷰 방을 고를 수 있었다. 비수기 만세!
이 날은 라우터브루넨에서 쉬는 게 아니고 또 융프라우 이쪽 절반을 계속 타고 돌아다닐 예정이었으므로, 인터라켄에서 일찍 체크아웃해서 라우터브루넨 호텔로 향했다. 한 열시 반 쯤 도착했는데, 방을 안 내 주면 짐이라도 맡기고 떠날 참이었다. 역시나 비수기 매직인지, 체크인시간보다 5-6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체크인을 시켜줬다!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된다)
로비에서는 에스프레소 커피머신, 물, 차를 언제든 이용할 수 있고, 레스토랑도 운영한다. 저 슬라이딩문 안쪽은 아침에 조식구역으로 활용되는데, 조식이 포함이다(야호!), 참, 엘리베이터도 있으니 낑낑거리고 짐을 들고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방은 꽤 넓었고, 디자인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뷰가 어마어마했다!
사진상에는 앞에 있는 지붕이 조금 눈에 거슬리는 듯 하지만, 실제로 보면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다.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뷰는 장관이었다. 스타바크폭포가 정말 가까이! 푸른 언덕 너머로 떨어지고 그 맞은편엔 흰 눈이 켜켜히 쌓인 산이 보였다.
원래는 가방만 두고 나가려고 했는데 뷰가 너무 멋진 나머지 우리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한 두시간을 저 뷰만 바라봤다. 어쩜 해도 쨍쨍떠서 이렇게나 아름다운지.
자, 이쯤되서 왜 이 방을 6시간이나 일찍 체크인을 해 줬냐 우리가 생각한 이유. 여기서 역으로 올라가 3번째의 사진 오른쪽을 보시라. 찾으셨는가?
ㅋㅋㅋㅋㅋㅋ에엥? 이게뭐야ㅋㅋㅋㅋㅋㅋㅋ 이 방은 60년대인가 스타였던 007배우 테마 룸이었다. 방 호수도 007이고 이 사람과 그 007 영화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다ㅋㅋㅋㅋㅋㅋ 글쎄, 중장년 007 팬이시라면 엄청나게 멋진 방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뭔가 좀 당황스럽다ㅋㅋ. 이 입간판은 첫 날은 물론이고 퇴실하는 날 까지 나를 놀래켰다. 언뜻 보면 누가 침입한 걸로 보인다고!ㅋㅋㅋㅋ 게다가 총도 들고있는..
007이 방의 가격에 영향을 끼치는 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좋은 뷰의 좋은 방을 6시간이나 얼리체크인 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ㅋㅋㅋㅋ
오늘 계획은 우리가 갔던 루트 (그린델발트-아이거익스프레스)의 반대편 루트를 이용해 클라이네샤이덱까지 올라가 보는 것. 얼른 가서 기차를 탔다.
정말 아는 것 없이 탔다. 어제는 저쪽 루트를 탔으니 오늘은 이쪽 걸 다 타보자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세상에, 벵엔으로 올라가는 기차안에서 본 풍경에 우리는 넋을 잃었다.
기차는 경치를 뽐내는 양 아주 천천히 능선을 타고 올랐다. 커다란 창문 한 가득, 푸른잔디와 하얀 눈, 그리고 암벽이 이 경쟁하듯 빛이났다. 오밀조밀한 집들이 오종종, 그리고 그 뒤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폭포 물줄기가 새햐얗게 떨어졌다. 나름 여행을 많이 다녔고 좋은 걸 많이 봤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설산 따로, 폭포 따로, 산 따로, 멋진 들판 따로 보러 다니고, 그 것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차게 멋진 게 대부분이었다. 그게 다 모여있으니, 이게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벅찬 경치에 뇌가 따라오지 못해 버벅거렸다.
단연코 이번 여행에서 최고로 꼽히는 순간. 여러분 벵엔 가는 기차는 반드시 타세요.
클라이네샤이덱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점차 초록 잔디가 사라지고 설경이 대신했다.
클라이네샤이덱 도착.
13년전의 기억으로는, 그 때는 여름이었으니까 여기가 푸릇푸릇하고 따뜻한 경치를 뽐냈었다. 융프라우 요흐 꼭대기를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경치를 보기 위해 여기에선가 부터 기차 역으로 한 정거장만 걸어내려가기로 했다. 경치는 말도 안되거니와, 우리는 금새 음메- 하는 소떼에 둘러싸였다.
이 소들은 커다란 종을 메고 있는데 그 종소리는 중후하면서도 청아하게 '둥-' 소리를 냈다. 여러마리의 소들이 걸을 때 마다 둥- 둥둥 -둥 딩- 하고 맑은 종소리가 울려퍼졌고, 종종 소들이 내뱉는 움머-소리와 잘 어울려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소들은 바지런히 주인(?) 두 명을 따라갔고, 우리는 이 '움머-둥-움머-딩딩-움머-'에 홀린듯 엽서카드 같은 뷰를 걸어내려갔다. 잠시 멈춰서 싸간 복숭아와 함께 와인을 맛보았다. 이 때만 해도 좋았다.
우리는 곧 길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한참 전에 다음 기차역이 눈에 띄었어야했다. 하이킹 하겠다는 준비를 하고 온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간식이라든가 물이라든가 충분한 물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열차시간표에 따르면 마지막 기차가 5시인가 였고, 시간은 5시가 가까워져왔다. 그 타이밍을 놓치면 우리는 꼼짝없이 융프라우 산악지역 한가운데서 미아가 될 꼴이었다.
셋은 겁을 먹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계속 걸었다. 원래는 한 30분만 걸을 예정이었는데, 이미 서너시간을 걸은 후였다.
가까스로 눈 앞에 작은 역이 보였고, 열차에 올라탔다. 성수기라 자리도 없이 가득 찬 열차에서, 가까스로 마음이 놓인 우리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안도감과 함께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가 몰려왔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계단에 앉아있는데, 어떤 외국인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너네 사진 찍어줄까?"
??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왜? 싶었지만 그래 (뭐 그러든가 말든가 ㅋㅋㅋㅋ 이랬던듯..) 하고 사진기를 건넸고 그는 우리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피곤해 보이는 소녀(20대 초반이니 소녀라고 하자) 셋이 서로에 기대어 앉아 웃프게 웃고 있었다.
"아니 사진 찍어달라고도 안 했는데 왜 갑자기 사진을 찍어준다고 하지?"
"우리가 그렇게 안 돼 보였나ㅋㅋㅋ"
"사진 진짜 웃겨ㅋㅋㅋ 아이고 불쌍해"
우리는 사진을 받아들고 깔깔 웃었다.
나중에 지도를 보니 엄청 한참 걸어내려왔더랬다. 어느 역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지도에서 보고 셋이 깜짝 놀랐다. 이만큼을 걸었다고 우리?ㅋㅋㅋ 마지막에 기차 탄 게 다행이다. 이게 다 그 소들 때문이야- 이러면서.
클라이네샤이덱을 걸으면서 13년 전의 트랙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새하얀 눈에 덮혀 아무런 기억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무슨 호수(?) 연못(?) 이 있다고 해서 보러가려고 열심히 올라갔는데 바람은 더 미친듯이 불어재꼈고, 호수도 눈에 덮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걸어내려가 보고 싶었지만 다 온 천지가 눈이니.
푸르른 여름의 클라이네샤이덱이 그리웠던 건지, 첫 해외여행에 길을 잃는 모험을 했던 내가 그리웠던 건지 모르겠다. 눈 덮인 설경은 아름다웠고, 나는 남편과 함께 새로운 기억을 더해 넣었다.
그래도 그냥 내려가기는 아쉬우니 내려가는 길에 뷰가 잘 보이는 곳에서 내려보기로 했다. 점심도 먹어야 하고.